“근데, 이분은 대체 누구십니까아∼?” 한 여자를 둘러싼 네 부자의 못 말리는 소극(笑劇) <귀여워>의 한 장면. 처음으로 아버지를 만난 건달 뭐시기가, 계속해서 난데없이 끼어드는 문제의 여자 순이에게 날리는 잊지 못할 명대사다. 뭐시기를 연기한 정재영은 그 장면을 두고, “그때, 그 상황에서 (예)지원이를 보고 있으면, 저절로 그런 말이 튀어나온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막상 <귀여워>를 보고난 관객이 그에게 묻고 싶은 질문이다. ‘근데, 대체 누구십니까?’ <킬러들의 수다>의 엉뚱하고 멀끔한 저격수 재영 이후, 가진 것은 힘밖에 없는 독불(<피도 눈물도 없이>), 내세울 것은 깡 하나뿐인 제1조장 한상필(<실미도>), 어리숙하지만 사랑을 향해 한발한발 내딛는 동치성(<아는 여자>)까지, 따지고 보면 한번도 비슷한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었던 그이건만 날건달의 진짜 세계를 (말 그대로) 맨몸으로 소화하는 신들린 연기를 보고 있으면 이 사람, 정말 어떤 사람일까, 문득 궁금해지는 것이다.
그는 8년 전 <박봉곤 가출사건>에서 외로운 스크린 신고식을 치렀다. 당시에는 “동네 불량배 역할로 고작 두신 나오는 주제”에 온갖 설정을 준비해가는 바람에 감독을 난처하게 만들기도 했다. 이후 <초록물고기> <조용한 가족> 등에도 출연했다지만, 어떤 장면에서 나왔는지 아무리 자세히 설명해도 기억해내는 이 하나 없다. 그런 그가 장진 감독의 영화들을 통해 서서히 얼굴을 알렸고, <킬러들의 수다>에서 첫 주연을 맡았으며, 1천만 관객의 사랑을 받은 <실미도>를 거치면서 길거리를 나다니면 누구나 알아볼 만한 얼굴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묵직한 존재감 혹은 가능성을 만방에 떨친 전환점은, 단언컨대 <귀여워>다. 전라도 출신 날건달의 사소한 행동과 말투를 그대로 체화한 채 나름의 뭐시기를 만들어간 <귀여워>에서 그는 빛을 뿜어내는 듯 눈부시다. 균일하게 무게가 실린 만만찮은 캐릭터들 속에서 뭐시기가 유난히 눈길을 끄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귀여워>의 뭐시기가, 처음부터 작정하고 달려들 만큼 녹록한 캐릭터는 아니었다고, 그는 회고한다. “처음엔 거절했어요. 너무 어려울 것 같았으니까. 뭐시기가 왜 이렇게 행동하는지도 모르겠더라고요.” 어렵사리 시작한 촬영은 또 어찌나 오래 끌었던가. 순이를 연기한 예지원은 중간에 <대한민국 헌법 제1조>를 모두 찍고 개봉까지 마치고 돌아왔지만, 여전히 그들은 촬영 중이었다. 그러나 현장에서 “시선을 앉으면서 줄 것이냐, 일어나면서 줄 것이냐, 같은 정말로 사소한 설정 하나를 가지고도 감독과 갈등할 만큼” 애착을 가지고 임했던 그에게 가장 큰 고민은, ‘또’ 건달 역할을 맡았다며 매너리즘을 운운할 주위의 시선이었다고. 그래서 그는 결심했다. “그럼 좀 다르게 가보자. 만날 보는 건달이 아닌 진짜 건달을 보여주자. 그러면 다른 얘기는 못하겠지.” 결과는 사뭇 감동적이다. 건달이 들어가지 않으면 영화도 아니라는 듯 우후죽순처럼 만들어지는 조폭영화 속에서 절대로 볼 수 없었던 ‘행동하는 건달’ 뭐시기가 그로 인해 탄생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사진 촬영을 위해 스튜디오에 조명이 켜진다. 이것저것 포즈를 취해보던 그가, 이내 “헤…. 이제 할 게 없네”라며 쑥스럽다는 듯 말꼬리를 흐린다. 디지털카메라를 통해 바로 결과를 확인하고는 자신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어, 이게 누구예요?”라며 낯설어한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과감하게 굴곡진 그 얼굴, 실례를 무릅쓰고 말하자면, 정말 잘난 얼굴이다. “잘생겼다는 말 많이 듣죠?” 무심결에 던진 질문에 “많이 듣죠∼ 부모님한테. 남자는 모름지기 이렇게 생겨야지, 라면서”(웃음)라는 너스레가 돌아온다. 그러나 이처럼 어떤 상황에서도 나름의 페이스를 잃지 않을 듯한 그에게도 소소한 고민들은 분명 존재한다고. “시나리오 안 들어오던 시절에는 어쩌다가 시키는 것만 하면 되지만, 이제는 투자나 이런 부분까지 신경써야 하니까 좀 부담스럽죠. 무명일 땐 뭘 하든 망가지든 누가 신경도 안 쓰는데 이제는 선택도 신중해야 하고. 그런 부분들이 연기보다 더 힘들어요.” 자기도 모르는 새 명실상부한 충무로의 주연급 배우 중 한 사람이 되어버린 배우라면 느낄 수밖에 없는 솔직한 잡념들. 그러나 본인도 인정하다시피, 1시간 반 동안 이어지는 연극 무대에서조차 줄기차게 집중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 아니던가. 하물며 이것은 끝없이 이어지는 연기 인생이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크고 작은 부침쯤은 느긋하게 참고 견딜 만한 여유가 그에게 있다는 사실이다.
정재영의 건달 체험기 - 나는 어떻게 뭐시기가 되었나
진짜 건달들이랑 1주일 정도 합숙했어요. 그 이후에도 이틀에 한번씩 만나서 술 먹고, 경마장 가고, 사우나도 가고. 이번 기회에 건달에 대한 선입견이 많이 깨졌어요. 처음에 같이 사우나에 갔을 땐, 아휴∼ 이건 뭐, 그냥 화투장들이 막 날아다니는 거야. 문신들이, 여기저기서 난무하는데…. 처음엔 눈길 둘 곳도 못 찾고 앉을 자리도 모르겠더라고요. 어렵게 자리 찾아서 앉아 있다가도 누가 들어오면 슥∼ 일어나는 거야(진짜 일어나 보이는). 신문도 좀 보다가 누가 옆에서 보려고 하는 것 같으면 다 본 것처럼 하고 내려놓고(역시 앞에 놓인 <씨네21>로 그대로 재현). 그러다가 이제 좀 편해지니까 “에∼ 이 문신은 좀 조잡하다”면서 친한 척도 하게 됐죠. 후후. 그렇게 같이 지내면서 관찰한 것들이 그대로 머시기의 모습으로 재현된 셈이에요. 실제로 그들도 만날 양복입고 다니고, 휴대폰을 보물 다루듯 하거든요. 휴대폰은 무조건 신형! 그게 신조예요. 영화 속에서 뭐시기가 출소하자마자 휴대폰 선물하는 장면 같은 건 정말 리얼한 장면이라니까요. 화장실 갈 때도 휴대폰을 끼고 다니다가 형님한테 전화오면, 벌떡 일어나서는 “예, 형님. 무슨 일이십니까” 이러면서 정자세로 받아요(그대로 재현해 보이는). 화나서 수화기를 입에 댔다가 귀로 가져갔다가 하는 장면도 실제로 참고한 설정이고. 정말 인상적이었던 건, 과장된 팔동작이었어요. 양복을 입으니까 팔이 불편해서 습관처럼 앉을 때나 일어날 때나 손을 한번 위로 올리게 되는 거예요. 처음엔 그게 진짜 이상했는데, 자꾸 하다보니까 나중엔 고치는 게 더 어렵더라니까. 그리고 그 표정! 극도로 화가 나기 전까지는 여유를 가지려고 애쓰는 어색한 표정도 많이 참고했죠. 말투의 경우는… 그게 원래 전라도 사투리가 아니거든요. 전라도 출신 건달 말투랄까. 쪽팔려서 사투리를 안 쓰려다보니까 생긴 말투 같아요. 무조건 “∼까”랑 “∼다”로 일관하는 말투, “그랬습니까, 형님∼” 이런 식이죠. 이번에 그 말투는 확실하게 익혔어요. 어디서 다시 써먹을지는 모르겠지만.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