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머리 쓰지 마라. 머리는 내가 쓴다.” 오홋! 대단한 자신감이다. 이런 대사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사기계의 전설 김선생이나 되어야 가능하다. 김선생, 그는 ‘접시돌리기’의 달인이다. 접시를 몇 겹씩 겹쳐놓고 공중에서 뱅글뱅글 돌리는 묘기를 구사할 때에, ‘사기’ 재질로 만들어진 그 접시는 단 한번도 바닥에 떨어져 깨진 적이 없다. 업계의 전문가들조차 그 유려한 예술가의 솜씨에 찬탄해 마지않는다. 그 입장이라면 누구나 김선생처럼 천하의 나르시시스트가 되었을 것이다.
“청진기 딱 대보니까 진단이 나온다. 시추에이션이 괜찮아.” 그가 믿는 것은 오직 자신의 ‘감’ 뿐이다. 실패를 모르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라는 낡은 속담을 실행하기는커녕 그는 한국은행을 털겠다는 최창혁의 황당한 계획에 아주 쉽게 동의한다. 흩어진 옛 멤버들을 손수 규합하여 팀을 만든다. 진단을 내리는 데는 딴 거 필요 없다. 청진기 하나면 족하다. 하기야 엑스선 촬영이나 씨티 촬영 따위 최신 장비가 명의의 자존심에 가당키나 할쏘냐.
“4년전 일 때문에 그러십니까? 소문에, 그때 확 쪼그라들었다 그러던데.” 창혁이 슬쩍 한번 찔러본 말에 길길이 뛰는 김선생의 태도가 예사롭지 않다. 이미 젊지 않은 그 남자는, 아직 젊은 남자가 자신을 야기죽대는 꼴을 참지 못한다. 더구나, 그 애송이가 자신을 배신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늙은 남자의 분노는 극에 달한다. 누가 봐도 판을 접어야 할 때 그는 물불을 가리지 못한다. 어린놈에게 뒤통수를 맞는 순간 이성과 위엄은 사라졌다. 도리어 허술한 부동산 사기 사건을 도모하여 또 한번 허방에 빠지는 것은 상처받은 명예를 일거에 회복시켜 보려는 몸부림에 가깝다.
“늙으면 추해도 돼!” 단호하게 내뱉는 그 한마디에 그의 진심이 응축되어 있다. 이빨 빠진 호랑이로 전락한 제 신세를 인정하지 못하는 남자, 자신보다 뛰어난 능력을 갖춘 녀석에게 ‘당했다’ 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남자. 마침내 총을 들고 애송이를 잡으러 달려가는 그는 더 이상 전설의 인물이 아니다. 자신만만하던 영혼에 치명상을 입은 초라한 ‘늙은 수컷’일 따름이다. 수컷의 세계에서 최고라고 인정받기 위한 투쟁은 공공연한 일이다. 힘은 남아있지 않지만 자존심은 남아있을 때, 어떤 남자는 몰락한 현실을 묵묵히 견디고 또 다른 남자는 비애를 과장되게 발산한다. 김선생은 과감히 후자를 선택했다. ‘젊은 수컷’ 에 대한 타협을 거부하고 ‘바닥을 친’ 그 늙은 남성성은 기필코 파국을 맞는다. 살아서 모욕을 당하느니, 그는 차라리 죽음이 다행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