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식민지 공주’라는 농담을 자주 하곤 했다. 식민지 공주에는 여러 부류가 있다. 가장 식별하기 쉬운 건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공주’로 사는 계열이다. 이를테면 프랑스제 명품을 걸치고 뉴욕 스타일의 카페에 앉아 어쩌고저쩌고 식의 에스프레소를 마시며 꼬질한 이 바닥에서 10cm쯤 붕 떠 사는 언니들, 2세에게라도 식민지 딱지를 벗겨본다고 ‘원정출산’이라는 국제적 빈티를 흘리고 다니는 언니들이다. 사실 이 부류는 불행하다고 볼 수 없다. 남들이 뭐라든 본인이야 ‘식민지’ 수사를 가린 ‘공주’라는 명패를 달고 속편하게 살아가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불행한 건 이른바 선진국의 상품 대신 문물을 받아들인 언니들이다. 자유연애, 남녀평등, 직업적 야심에서 분방한 거리의 문화에 이르기까지 식민지 또는 후진국에는 존재하지 않던 문화적, 정신적 양식을 습득한 ‘식민지 공주’들에게는 발랑 까진 것, 되바라진 것이라는 비난만 돌아올 뿐이다. 전자의 경우는 돈만 받쳐주면 행복해질 수 있지만 후자는 식구들을 비롯해 학교, 회사, 언론 등 사회제반의 이해가 받쳐줘야 행복해질 수 있기 때문에 실상은 결코 행복해질 수 없는 축의 인간들이다.
<미치고 싶을 때>의 시벨도 후자에 속하는 부류다. 터키에서 태어나 ‘그냥’ 터키인으로 살았으면 그렇게도 ‘미치고 싶지’ 않은 삶을 살 수도 있었을 것을 터키계 독일인으로 독일사회의 개방성에 개안한 탓에 미치고 싶다. 한마디로 이 영화는 선진문물에 ‘눈 베린 년’의 수난기인 것이다. 고등학교 수학여행 때 부모가 챙겨주는 콘돔을 가지고 오는 아이들과 함께 학교를 다녔으면서 정작 친구들은 다 동거에 들어갈 나이에 결혼을 해야 독립을 할 수 있는 상황에 처한 여자의 난처함. 머리(생각) 따로, 외모(관습) 따로 살아가는 여자가 정신분열증에 걸리는 건 특별히 놀랄 일도 아닌 것이다.
<미치고 싶을 때>는 식민지 공주의 말로까지 섬세하게 그려낸다. 시벨은 짐을 싼다. 그러나 남편의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그냥 주저앉는다. 남편이 무서워서가 아니다. 그는 이곳 아닌 곳의 삶을 꿈꾸었고, 그 열망은 아직도 가슴속 깊이에서 꿈틀거리지만, 그는 알고 있다. 이곳이 아닌 곳으로 떠나더라도 그 삶은 크게 바뀔 수 없을 것이라는 쓰디쓴 진실을. 지금 입은 옷이 자기에게 맞지 않는 걸 괴로워하지만 다른 옷을 입더라도 폼새가 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는 여자, 너무 많이 알아서 행복해질 수 없는 여자, 식민지 공주는 시벨의 다른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