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영화보는 즐거움을 만끽한 날이었다. 11월8일 <하나와 앨리스>와 <팜므 파탈>을 연달아 봤다. 하나는 너무 귀엽고 예쁜 영화였고 다른 하나는 너무 자극적이고 농염한 영화였다. 전혀 다른 매력이지만 둘 다 대만족이다. 이런 날만 있으면 영화잡지에서 일하는 거 정말 할 만하다.
<하나와 앨리스>를 보고나니 이와이 순지가 쓴 책 <쓰레기통 극장>에서 그가 오즈의 영화에 대해 쓴 대목이 떠올랐다. “오즈에게 있어서 사랑하는 딸을 시집보내는 날의 쓸쓸한 밤만이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하는 전부였던 것처럼 생각된다. 인생이란 필름에서 그 하룻밤만을 잘라내 몇번이나 계속 찍는다. 그런 이질적 행위가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인 것이다.” 어쩌면 이와이 순지는 같은 말을 자신에게 되돌리고 싶었는지 모른다. <하나와 앨리스>를 보노라면 그에게 인생은 10대 소년 소녀가 성장하는 순간에 머물러 있다. 친구와 한시도 떨어지고 싶지 않던 그날들, 혼자 두근두근 연애의 상상에 가슴 졸이던 그날들이 이와이 월드의 정서적 중심을 이룬다. 오즈의 영화처럼 그의 영화도 “마치 그곳만 손때 묻어 더러워진 앨범의 한 페이지처럼 묘하게 쓸쓸하다.”
<하나와 앨리스>를 보고 나서 길을 걷다가 하교하는 교복입은 소녀들과 마주쳤다. 방금 본 영화 때문에 ‘야, 정말 좋은 때구나. 아유, 깜찍한 것들’이라는 말이 머리에서 맴돌았다. 그런데 소녀들의 옆을 스쳐가다 내가 들은 말은, 오, 세상에. “지랄하고 있네. XXX.” 헉, 너희들이 정녕 이 땅의 하나와 앨리스란 말이지, 나의 소녀 판타지는 단숨에 날아갔다. 그래서일까. <팜므 파탈>을 보면서 묘하게 안심이 됐다. 여자의 관능과 마성에 대한 드 팔마식 찬양은 너무 뻔뻔해서 오히려 정직해 보인다. 훔쳐보기의 쾌락이 영화의 본질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하는 드 팔마는 영화로 천하고 음란한 예술품을 만든다. 천하고 음란하다는 표현에 발끈할 필요는 없다. 천하고 음란한 속성이 없었다면 영화는 결코 지금 같은 부귀영화를 누릴 수 없었을 것이다(드 팔마는 <필사의 추적>에서 진짜 살인까지 구경거리로 포섭하는 영화의 악마적 성격을 보여준 바 있다). <팜므 파탈>에서 안토니오 반데라스는 훔쳐보는 앵글로 찍은 사진으로 거대한 모자이크 벽화를 만드는 파파라치로 등장한다. 할리우드 고전기 장르영화에 대한 모방과 변주로 일관해온 드 팔마의 영화적 태도가 안토니오 반데라스의 사진작업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완전히 새로운 무언가를 만드는 대신 그는 익숙한 이미지의 변형과 충돌에서 자기 영화의 돌파구를 찾았다. 이와이 순지와 드 팔마는 전혀 다른 성격의 작가지만 둘 다 자기가 믿는 영화 매체의 속성을 자기 영화 안에서 적절히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9년 전 <씨네21> 기자로 첫해를 맞던 때,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과 <쇼걸>을 같은 날 같은 극장에서 본 적이 있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을 보면서 그래, 진실을 말하는 영화가 최고야, 라며 눈물을 흘리다가 불과 몇초 사이에 <쇼걸> 매표구에 돈을 내미는 나를 발견했던 것이다. 내 행동을 합리화시킬 당당한 이유가 없어서 혹시 누가 볼까 걱정했던 기억이 난다(그런 경험을 한 게 나 혼자는 아니었는지, 어떤 단편소설에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과 <쇼걸>을 연달아 본 사람의 이야기가 나와 화들짝 놀란 적도 있다). 지금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안다. 영화 자체가 갖는 모순적 속성을 인정한다면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쇼걸> <하나와 앨리스> <팜므 파탈>이 자연스럽게 공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호에 실린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의 인터뷰도 이런 맥락에서 읽어보면 좀더 쉽게 다가올 것이다. 그는 마르크스주의자이자 할리우드 영화광인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갈등에서 철학적 고민이 비롯됐다고 말한다. 한정된 지면으로 랑시에르 영화철학의 전모를 드러낼 순 없지만 랑시에르 인터뷰는 영화란 무엇인가에 관해 진지하게 생각해볼 기회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