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80년대 청춘과 21세기 청춘의 만남, <발레교습소> 제작기 [1]
2004-11-30
글 : 이영진
변영주 감독과 신인배우들은 <발레교습소>를 통해 어떻게 성장했나

변영주 감독의 <발레교습소>는 스무살 문턱을 힘겹게 넘는 젊은이들을 향한 응원이다. “내가 어른이 된 날이라고 동그라미 칠 수 있는 하루가 있다면, 그 특별한 하루에 관한 영화”라고 <발레교습소>를 소개했던 변 감독은 영화에서 “하기 싫은 것은 많으나 하고 싶은 것은 없는”, 그러다 세상에 린치당하고서야 삶의 길이 만만한 여정이 아님을 깨닫는 젊은이들의 긴 하루를 뒤쫓는다. 12월3일 영화 개봉에 앞서 청춘예찬으로 가득한 변 감독의 제작일지를 소개한다. /편집자

1984년 겨울, 고3 수험생이었던 나…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

조개탄이 잔뜩 들어 있던 난로는 아직도 엄청 뜨거웠고, 학력고사(지금의 수능) 마지막 시험시간은 이제 10분을 남겨놓고 있었다. 괜히 눈물이 나왔다. 초등학교로부터 12년. 그 긴 시간들을 고작 몇장의 답안지로 성공과 실패를 결정한다는 것도 불쾌했고, 환기가 안 돼 매캐한 교실의 공기도 참을 수 없었다. 수험장을 제일 먼저 빠져나온데다 눈까지 퉁퉁 부어 있는 나를 보고 어머니는 순식간에 절망어린 표정을 지으셨다. 퍼렇게 언 어머니의 얼굴도 내게는 감동이나 걱정보다 불쾌함의 연장선이었다.

그날 이후, 나와 친구들은 서둘러 어른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혔다. 오전 수업이 끝나면 숙명여대 앞 레스토랑으로 우르르 몰려가 느끼한 콩조림이 잔뜩 들어간 돈가스와 맥주를 마셨고, DJ박스 안의 남영동 양아치오빠와 연애에 빠졌다. 일찌감치 노량진의 재수학원을 등록한 친구를 찾아가 <탄드라의 불>과 <프로젝트 A>를 동시 상영하는 극장 안에서 뻐끔담배를 마구 피워댔고, 저녁이면 민속주점에서 막걸리와 김치찌개를 먹었다. 주위의 권유로 종로의 영어학원에서 ‘버캐뷸러리22000’ 강좌를 등록하고 종로서적에서 하루를 보냈다. 그때 나를 미치게 했던 건 김지하의 <빈 산>이라는 시와 이용의 <잊혀진 계절>과 그리고 배창호 감독님의 <깊고 푸른 밤>이었다. 매일 밤 절망하고 다음날마다 무료했던 나날들이 지나가고 나는 그렇게 스무살이 되었다.

2003년 12월, 영화감독이 되어 오디션장에서… “영화는 절망과 환희가 돌고도는 굴레 ”

여의도의 한 연기학원 강당에서 10시간 동안 오디션을 보았다. 서툰 재능과 잔뜩 과장된 장기를 열정으로 포장한 채 열심히 자신을 보여주는 신인배우들을 보며 나는 1984년의 겨울을 떠올리고 있었다. 우리는 두려움과 패기가 뒤섞여 있는 얼굴을 찾는다. 하지만 신인의 얼굴은 언제나 확고하게 단순하다. 아주 칙칙하거나 너무 화려하다. 누군가 나름 준비를 많이 해왔는지 <밀애>를 보고 좋았다고 이야기한다. 무의식적으로 좋아하며 채점지에 만점을 주는 나를 신혜은(내 모든 영화의 프로듀서이며 <발레교습소>의 시나리오를 쓴 나의 영화동지)이 안타깝게 쳐다본다. 내 등을 두드려주며 한마디 씹는다. “아직 흥행 실패의 상처가 가라앉지 않았구나?” 사실 이미 상처는 깨끗이 아물었다. 베를린영화제에서 <밀애>를 다시 보면서 나는 절망에 빠졌고 나 같은 인간은 다신 영화를 만들지 말아야 국가경제에 도움이 된다고 자학했다. 그로부터 10개월 뒤, 지금 나는 새 영화를 위해 오디션을 보고 있다. 나의 용기에 감동한다. 돌이켜보면 난 언제나 그래왔다. 영화를 완성하면 언제나 좋은 영화라 우기고 몇 개월 뒤 절망하고 자학한다. 그러면 어느 순간 다음 영화를 끌어안고 있다. 내가 영화를 만드는 한은 언제까지나 지속될 이 절망과 환희의 연속.

2003년 12월 말, 성인 연기자 캐스팅… “생각만 해도 흥분되는군”

도지원, 이정섭, 진유영 선배 등을 만나 이 영화의 주요 성인 연기자들을 최종 캐스팅했다. 발레교습소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피곤하고 퇴락한 30대 발레교사 역에 발레리나였던 맑은 얼굴의 지원씨를 원했던 건 너무 당연한 선택이었다. 첫 영화출연에 겁을 먹으며 심사숙고하는 그녀에게 <할렐루야>에 카메오 출연했던 것을 언급한 건 전적으로 나의 실수였다. 다행히 그녀는 그냥 넘어가주기로 한 것 같다. 독특한 캐릭터를 갖고 있는 이정섭 선배를 나는 예전부터 추레한 노인으로 만들어보고 싶었다. 비디오 가게 주인인 배도일 역을 선배에게 제의했다. 1970년대 한국 청춘영화의 중심에는 진유영이라는 배우가 있었다. 안티히어로 역의 단골배우였던 그를 생각하면 나는 1960년대의 김희라가 생각난다. 이장호 감독님의 영화 <어제 내린 비>에서 처절한 안티히어로 역을 소화했던 그의 얼굴은 결국 70년에서 80년대 초반 진유영의 얼굴과 겹치곤 한다. 그런 그에게 2004년 못난 청춘의 표상인 강민재의 아버지 역을 맡긴다는 건 생각할수록 흥분되는 일이다.

2003년 12월, 김민정에게 장광설…“아, 난 구라쟁이!”

<발레교습소>의 여주인공 황보수진 역의 캐스팅을 위해 김민정을 만났다. 커다란 눈을 동그랗게 뜬 이 인형 같은 배우는 의외로 얼굴에 감정을 숨길 줄 모른다. 말로는 고민이 된다고 하는데 얼굴은 이미 하기로 결심한 게 역력하다. 그 느낌에 감동받은 나는 두 시간 동안 쉬지 않고 <발레교습소>의 의미와 한국에서의 여배우의 역할에 대해 떠들어댔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난 정말 구라쟁이다. -_-a

2004년 1월, 조연관찰하다가…“앗, 취해버렸다~”

주인공 강민재 역을 제외한 모든 캐스팅을 완료했다. 오디션을 통해 뽑은 네명의 조연급 남자 아이들을 만났다. 민재의 친구로, 혹은 형으로, 영화에서 청춘의 느낌을 한껏 보여줘야 할 이 친구들을 모두 불러모아 협박도 하고 용기도 북돋워주기 위해서였다. 신인배우와 경험이 많은 배우와의 차이는 좋은 표정이 있거나 없는 것이 아니다. 어떤 표정을 만들어내는 방법을 모른다는 것이다. 결국 이 자리는 나의 신중한 탐색전이 되었다. 술잔이 오가고 자리의 긴장감이 풀어지자 오히려 나는 촉각을 곤두세우고 아이들의 표정과 태도와 목소리의 색깔을 관찰한다. 창섭(온주완)이의 겸연쩍어하는 표정과 동완(이준기)의 매서운 눈초리와 종석(도한)의 어리둥절해하는 표정과 기태(김동욱)의 무관심을 가장한 사려깊음을 발견하고 혼자 즐거워하다가 과음을 했다.

글 변영주/ 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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