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80년대 청춘과 21세기 청춘의 만남, <발레교습소> 제작기 [2]
2004-11-30
글 : 이영진

2004년 1월, 윤계상 캐스팅…“자존심을 걸겠습니다!”

처음부터 이 영화는 주인공부터 신인이 될 확률이 많다고 생각했다. 열아홉살을 연기할 남자배우를 생각해보면, 감독이 무조건 믿고 동지처럼 기댈 수 있는 배우는 그리 많지 않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로 놀라운 연기를 보여주는 몇몇 배우들은 이미 열아홉의 연기를 보여주었거나 혹은 관객이 열아홉이라고 믿어주지 않을 정도로 나이를 먹었다. 몇년 전, 가수 윤계상의 사진을 몇장 나에게 보여주며 “한국영화에서 필요로 할 만한 얼굴이다. 뭔가 잘 풀리지 않는 소년과 긴장한 청년의 얼굴이 함께 있는, 이런 얼굴이 참 좋다”고 말하던 신혜은의 지적처럼 계상이의 얼굴에선 청년과 소년의 이미지가 함께 떠오른다. 그리고 오늘 그를 만났다.

처음 만난 계상이는 검은 머리에 짧은 커트를 하고 온몸을 긴장한 채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얌전히 앉아 있었다(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나한테 좋게 보이고 싶어 머리도 검게 염색했다고 한다. 이제 와서 말이지만 그건 계상이의 전략적 실수였다. 엄청 촌스러워 보였으니까). 계상이에게 이 영화에 몰두해주기를 당부했다. 혹시라도 가수로서의 유명세의 일환이나 그냥 연예인으로서의 다양한 경험이라고 생각한다면 같이 하지 말자, 내가 이 영화에 모든 것을 걸고 있는 것처럼 너도 모든 걸 걸어야 한다고 말했다. 갑자기 “목숨을 걸겠습니다”라는 대답이 터져나왔다. 옆에 조용히 있던 신혜은이 한마디 한다. “계상씨 목숨은 우리가 가져도 별로 쓸데가 없는데…. 자존심을 걸면 되죠.” 계상이에게 우리 아버지의 주민번호를 도용해 만든 이메일 주소를 하나 적어준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너랑 나랑 서로 공유하며 의견을 교환하자고 말한다. 이틀 뒤, 메일이 하나 와 있었다. 빨간색 궁서체로, 글자를 한껏 키운 한줄이 쓰여 있었다. ‘자존심을 걸겠습니다.’

2004년 1월에서 2월, 리딩과 춤 연습…“고마운 선배들, 잘 따르는 아이들”

모두들 지친 기색이 역력하다. 신인배우들에게 이정섭 선배 등 대선배들과 함께 리딩을 한다는 건 무척 부담스러운 일이다. 오랜 연극생활을 한 조한희 선생도 도지원씨도 어린 배우들에게 이런저런 조언을 세세히 한다. 무엇보다 이 사람들이 고마운 건, 기본적인 것 이상은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이상의 것은 감독의 결심과 취향의 문제라는 것을 이들은 너무 잘 알고 있다. 아이들은 정섭 형으로부터 호흡법을 배운다. 그리고 밤이 되면 모두 발레복을 입고 두세 시간 동안 기초발레와 공연안무 연습을 한다. 특히 발레 연습은 크랭크인 이후에도 당일 6시 전에 자기 분량 촬영이 끝난 배우는 무조건 나와서 해야 했다. 배우들은 수험생처럼 영화를 준비하고 있다.

2004년 2월, 윤계상의 선언… “연기나 춤, 둘 중 하나만 선택하세요”

나와 띠동갑이며 태어난 날이 같은 계상이는 점점 강민재가 되어가고 있다. 나와 미리 의논을 한 연기선생님과 함께 몇 시간 연습을 한 뒤, 나와 다시 만나 대본 리딩을 하고, 영화의 쟁점들에 대해 의논을 하고, 그리고 수다를 떤다. 하루는 자신감에 넘치고 다음날은 공포에 떤다. ‘윤계상은 이번 영화에서 춤 실력을 자랑할 것’이라는 내용의 캐스팅 기사를 가지고 한동안 계상이를 놀려먹었다. 춤 대역을 쓸지도 모른다는 보도자료를 돌려야겠다는 나에게 계상이는 진지하게 한마디 한다. “연기와 춤 중에 한 가지만 선택하세요. 전 둘 다는 못해요.” 한달 동안 이 녀석은 많이 컸나보다. 나는 발레도 연기라고 우겼다. 좀더 잠을 줄여야겠다고 중얼거리는 계상이는 이미 한달째 하루에 네 시간 이상을 자지 못했다.

2004년 2월, 첫 촬영… “계상이 클로즈업 좋네”

첫 촬영. 이 영화의 가장 큰 난관은 나무에 새순이 돋기 전에 야외장면을 모두 끝내야 한다는 거다. 편의점으로 들어가 겨울 한정 판매 초콜릿을 한 봉지 사며 결심한다. ‘야외촬영 마지막 날 꼭 너를 다시 사러올게.’ 첫 촬영이라고 오늘 촬영이 없는데도 모든 배우들이 모여들고 있다. 매일 이어지는 발레 연습 때문인지 배우들은 흡사 한 극단 소속 단원인 듯 친숙하다. 자신과 너무도 다른 계층의 소년 기태를 조우하는 장면. 계상이의 첫 클로즈업 연기다. 계상이의 얼굴엔 어떤 감정이 있다. 배우로서 참 좋은 장점을 가졌다고 생각해본다.

2004년 3월, 감정이입이 중요한 이모집씬… “세번의 테이크, 자꾸 당기는 초코파이”

내 기도의 효험이 너무 강하다. 영하로 뚝 떨어진 날씨. 뭐 이렇게까지 해주실 필요는 없는데. 오늘은 야외장면 중 가장 중요한 장면을 촬영하는 날이다. 민재가 이모집에서 난동을 부리고, 아버지에게 복도로 끌려나와 자신의 속마음을 아버지에게 터뜨리는 장면. 계상이가 가장 어려워하고 자신없어하는 장면이다. 어젯밤, 연습실에서 함께 대사를 말투에 맞게 수정하고 감정을 정리하고 내가 직접 연기시범을 해보였다. 솔직히 나의 숨겨진 재능에 스스로 엄청 놀랐다. 계상이에게 물어본다. “나 정말 연기 잘하지 않냐?” 계상이는 바로 외면하더니 신 피디와 담배를 나누어 피운다. 내 연기에 대한 질투라고 믿기로 한다.

새벽 두시까지 지속된 연습. 잠시 헤어져 집으로 와 눈을 붙이곤 새벽에 현장으로 갔다. 러프해 보이지만 사실은 무척 계산되어 있는 진유영 선배의 연기와 철저하게 캐릭터의 감정에 이입하고 의존하는 계상이의 감성적인 연기가 잘 어우러진다. 세번의 테이크. 그 세번 동안 계상이는 시간을 두고 자기 감정을 만들어가며 열심히 울어대고 있다. 민재의 감정이 중요한 모든 장면은 핸드헬드로 촬영된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 가장 몸을 혹사하고 있는 건 촬영감독이다. 촬영감독 옆으로 가서 괜히 다큐멘터리를 만들던 시절의 이야기를 해본다. 그냥 웃는다. 아, 슬슬 스탭들이 나를 귀찮아하는 것 같다.

<숨결> 때부터의 스크립터인 소현이가 나에게 초코파이를 준다. “감독님, 스트레스 쌓이시죠? 푸세요.” 그래서 찌는 살도 책임져줘 소현아. 단것들을 꾸역꾸역 입 안으로 밀어넣는다. 신기한 일이다. 평소엔 절대로 먹지 않는 단 커피와 초코릿이 촬영을 할 때면 입덧을 하는 것처럼 당기곤 한다. 얼마 전 출산을 한 올케처럼 나도 산후다이어트가 필요하다. ㅠㅠ

글 변영주/ 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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