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80년대 청춘과 21세기 청춘의 만남, <발레교습소> 제작기 [3]
2004-11-30
글 : 이영진

2004년 3월, 신인배우들 연기 방해하기… “감독님, 나중에 두고봐요”

거의 대부분이 신인인 우리 배우들은, 자신이 보았던 다른 배우의 표정을 종종 흉내내곤 한다. 마음속에서는 캐릭터의 감정에 의해 연기를 하지만 머리에서 한번 걸러지면서 기억 속에 가장 좋았던 어떤 배우를 따라하는 것이다. 나는 때때로 잔뜩 감정에 몰입해 있는 배우들의 상태를 파괴하기 위해 애쓰곤 한다. 열심히 준비한 어떤 것들을 한순간 농담처럼 지워버리게 하고, 어리둥절한 채 다시 캐릭터에 집중하게 한다. 그런 이유로, 현장에서 배우의 집중을 방해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은 다름 아닌 나다. 카메라 앞에서 긴장한 채 대사를 준비하는 준기에게 다가가 수다를 떨고 말도 안 되는 농담을 한다. 민정이는 좀 다르다. 테크닉에 익숙하고 표현력이 좋은 민정이의 경우엔 의외의 모습을 자꾸 요구하게 된다. 방법은 마찬가지다. 무척이나 상식적이고 모범생인 민정이는 무척 성숙(?)된 의식을 가지고 있다. 현장에서 민정이의 별명은 아줌마였다. 반면 계상이는 유연한 편이다. 그런 계상이에게는 면박을 자주 준다. 순간적으로 움츠러드는 계상이의 표정은 바로 민재다. 속이 상했는지 쉬는 시간, 나에게 다가와 한마디 한다. “전 나중에 꼭 한편만 감독을 할 거예요. 그리고 감독님을 캐스팅할 거예요. 두고봐요. 내가 똑같이 해줄 테니까.” 단지 복수를 위해, 젊은 나이에 너무 리스크가 큰 선택은 아닐지.

2004년 3월, 민정에 대한 계상의 질투… “나도 저만큼 정확했으면”

황보수진네 황보식당에서 며칠간 촬영이 지속된다. 계상이는 촬영이 없는데 매일매일 현장에 들러서 민정이의 연기를 본다(야식 때문일지도 모른다). 수진이가 어떤 깨달음을 얻게 되는 이 공간에서의 클라이맥스 장면을 모니터로 지켜보던 계상이는 어느덧 민정이의 정확한 연기에 대해 질투를 느끼는 것 같다. 나는 이럴 때 즐겁다.

2004년 5월, 지속되는 테이크… “계상의 표정에 틈새가 있구나”

세트 촬영의 클라이맥스, 민재 이모집에서의 설날 점심 식사 장면이다. 설명할 수 없는 가슴속 응어리가 제어되지 않은 채 폭발하는 장면이다. 몇년이 지났을 때 자기도 모르게 그날이 내가 어른이 된 날인가라고 자문할 바로 그날. 콘티는 철저하게 민재의 감정적 시점숏과 민재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태도로 꾸며져 있다. 지속되는 테이크. 진유영 선배도 계상이도 그리고 이모집 식구들도 지쳐간다. 계상이를 따로 불러 감정에 대해 한참을 이야기한다. 경계에 선다는 것은 언제나 설명하기도 힘들고 구현하기도 힘들다. 어느 순간 민재의 눈에 빛이 난다. 오늘 이 녀석은 예민한 스펀지 같다. 나도 예민하다. 계산하지 않고, 틈새 같은 표정이 나온다. 카메라 옆에서 그 표정을 보며 나도 모르게 주먹이 쥐어진다. 고맙다는 생각마저 든다.

2004년 5월, 꼬이고 꼬이는 무대씬… “감독님, 초코파이 드시고 화푸세요”

발레공연 장면을 위해 며칠 동안 배우들은 무대에서 고생을 하고 있다. 무엇보다 정섭 형이 참 고맙다. 허리가 좋지 않은데도 형은 무대를 떠나지 않고 계속 같은 동작을 반복해준다. 공연복과 분장 때문에 배우들은 모두 촬영장에서 한발도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분장실에서 모든 걸 해결한다. 모두 지쳐 있다. 춤을 추고 음악에 박자를 맞추는 것이 중심이 되다보니 배우들이 조금씩 긴장감을 잃어간다. 결국 공연 또한 춤은 아니다. 연기일 뿐이다. 조금은 방만해져 있는 배우들. 큰소리를 치며 혼을 낸다. 실내는 금연이지만, 모니터로 돌아와 담배를 피우며 분위기를 냉랭하게 만들어본다. 가발을 쓰고 진한 무대화장을 한 민정이가 조심스레 내 앞에 다가오더니 손에 무엇인가를 쥐어준다. 초코파이다. 이것들은 나에 대해 너무 많은 걸 알고 있다.

2004년 6월, 대망의 촬영 쫑파티… “우리 배우들, 건투를 빈다!”

그 지겹고 두려웠던 나의 1984년 겨울. 결국 몇년이 지나서야 난 그 두려움이 내 20대의 삶 전체에서 결코 해결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우리는 어느 순간 의무적으로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좌절하고 땅을 파듯 자신의 삶을 꾸려나가는 어느 날 조금씩조금씩 자신의 성장을 눈치챌 뿐이다. 우리의 청춘이 그러하고 삶이 그러하듯, 지금 마지막 촬영을 끝내고 길거리에서 서로 캔맥주를 몸에 부어주며 만감을 나누는 나의 배우들 또한 그러하다. <발레교습소>와 함께 배우로서의 출발점에 선, 혹은 자신의 새로운 성장을 자각하고, 한 걸음 다음 성장을 위해 발을 내딛는, 그리고 삶의 연륜과 연기자로서의 연륜을 어느덧 통합해버린, 우리 <발레교습소>의 배우들, 건투를 빈다!

글 변영주/ 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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