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유머 가득한 안티 맥도널드 CF, <슈퍼 사이즈 미>
2004-12-02
글 : 심영섭 (평론가)

거대한 입술과 날름거리는 혓바닥이 제 몸의 전부인 저/ 굶주린 입들 무한궤도로 달려와 아이들을 삼키고 있다 / 입안 가득 고깃덩어리를 물고도 늘 배고픈. -박성우의 <햄버거>

JFK 공항에서 노숙을 하며 웰컴 투 아메리카를 경험하려드는 땡전 한푼 없는 한 사나이가 가장 먹고 싶어하는 음식이 있으니. 전 미국을 대표하는 배우 톰 행크스가 영어 한마디 못하는 동유럽인으로 시치미를 떼고 나와 열연하는 영화 <터미널>에서 빅토르 나보스키는 틈만 나면 코를 박고 웬디스 가게 안을 들여다본다. 물론 돈이 생기자마자 나보스키가 맨 처음 하는 행동도 재빨리 햄버거 가게로 달려가는 것이다. 이 프랑크 카프라식 인민주의의 이상향이 2004년 스필버그란 감독의 손에서는 ‘햄버거가 있는 낙원으로서의 미국’으로 재탄생되는 순간, 이제 햄버거는 먹을거리를 지나, 미국을 상징하는 일종의 기호로 작동하기 시작한다. 영화 <터미널>은 일종의 아메리칸 드림, 킹 사이즈 아메리카의 포부에 걸맞은 미국식 햄버거에 관한 예찬에 다름 아니다. 그러니 발목이 붓도록 자본주의를 욕망하는 자여. 코카콜라 한 모금과 맥도널드 햄버거를 먹을지니. 그 속에 자본주의라는 천국의 맛이 목구멍을 타고 우리를 간질인다.

자본주의의 상징 햄버거, 모건에게 도전당하다

그러나 시절은 바뀌어 햄버거 천국의 이야기도 진부한 전설이 되었다. 백설 공주 대신 슈렉이 판을 치고, 이 거대한 환영덩어리로서의 먹거리는 마이클 무어의 <화씨 9/11>이 그러하듯 한 뉴욕의 신출내기 감독에 의해서 철저하게 도전받는다. 30일간 오직 맥도널드 음식으로 배를 채운다는 맥 크레이지 다이어트에 도전한 모건 스펄록의 <슈퍼 사이즈 미>는 <필름 코멘트>의 앨리사 쿼트의 평가대로 ‘소화하기 쉽고 개인적이고 다양한 삽화들을 제공’함으로써 올해 다큐멘터리계의 기린아로 떠올랐다. 재미있는 것은 모건 스펄록이 뉴욕의 두 비만 소녀가 맥도널드를 소송한 사건에서 영감을 얻어 영화를 기획하기로 결심했을 때, 촬영감독인 스캇 앰브로지의 반응이다. 모건이 30일간 맥도널드 음식만을 먹겠다고 하자, 그는 단 한마디, “그것 참 나쁜 아이디어네”라는 말만을 내뱉었다고 한다. 이후 이 ‘bad idea’라는 슬로건은 스펄록이 맥 다이어트를 하는 내내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던 만트라(진언)가 되었다. 맥도널드 햄버거를 연속 삼일을 먹고 토했을 때도, 몸무게가 11kg가 찌고 지방간의 수치를 나타내는 GOT가 21에서 130이 되었을 때도 그는 이 ‘나쁜 짓‘이라는 말을 실천해나갔고, 이 말을 되짚어보면 <슈퍼 사이즈 미>가 가지고 있는 단 하나의 ‘good idea’도 ‘몸으로 부딪히자는 것’ 그것도 ‘내 몸으로 부딪히자는 것’ 한 가지라는 점을 깨닫게 된다. 일종의 몸의 정치학으로서 <슈퍼 사이즈 미>는 그 주관성에도 불구하고 관객을 설득시키는 데는 그만인 어떤 면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의사들과 영양사들을 대동하고 각종 수치를 인용한 원 맨 밴드 다큐멘터리는 비록 패스트푸드와 비만과의 인과관계를 밝힐 수는 없었지만, 그러나 콧물이 감기의 원인이 아니라고 해서, 콧물이 났을 때 독감 예방 주사를 맞지 말라는 법은 없는 법. <슈퍼 사이즈 미>는 미국식 실용주의적 논법으로 미국식 실용주의의 극치인 패스트푸드의 ‘편리함’과 ‘신속함’을 효과적으로 비판하고 있다.“난 사람들이 이 영화를 즐기기 바랐습니다. 마음속 깊이 난 아직도 영화가 코미디라고 생각하거든요. 극단적으로 무거운 주제를 다루는 블랙코미디라 할지라도 말이죠. 그러니까 조지 버나드 쇼는 사람들에게 진실을 말하게 하라. 그러면 당신은 사람들을 웃게 할 수 있든지 사람들 손에 죽을 것이다, 라고 말했죠.” 모건 스펄록 말대로 <슈퍼 사이즈 미>는 일종의 다큐멘터리라기보다, 일종의 안티 맥도널드 CF처럼 보인다. 영화는 ‘패스트푸드를 먹으면 죽을 수도 있다’는 무시무시한 위협을 유머란 당의정으로 감싸안음으로써 관객을 웃기면서 설득한다. 세살짜리 아이가 예수 그리스도보다 로널드 맥도널드를 더 잘 알게 된 사실. 미국 국민들이 국민교육헌장보다 빅맥의 슬로건을 더 잘 외우게 된 사실. 이보다 더 우스운 자본주의 국가의 개그가 어디 있단 말인가? 이러한 측면에서 <슈퍼 사이즈 미>는 영양가 만점의 교육물이자 최근 변화하고 있는 미국식 다큐멘터리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영화이기도 하다. 위대한 인물에 대한 예찬, 자연다큐멘터리, 환경다큐멘터리, 시네마 베리테 스타일로서의 다큐멘터리, 피 토하는 사회적 정의를 다 외친 다음에도 살아남아 장사 잘되는 블록버스터 다큐멘터리 말이다.

안티 맥도널드 CF같은 다큐가 30억원을 벌다

마이클 무어나 모건 스펄록의 다큐멘터리의 의도는 분명하다. 반대하겠다는 것이다. 이 반대의 그물망을 쳐놓기 위해서는 부시뿐 아니라 기업도 하나의 벌레처럼, 반사회적인 ‘사람’으로 다룬다. 그는 사악하다. 그는 바보 같다. 그는 미국이란 시스템을 좀먹고 있다. 분명한 목적을 품고 처음부터 기획되는 이 다큐들은 자극적인 화면들과 가장 말초적인 편집 기법을 동원하여 사람들에게 센세이셔널한 이미지의 포화 세례를 퍼붓는다. <화씨 9/11>에서는 이라크 소녀가 미끄럼틀을 타고 죽 미끄러져서 내려가는 장면 다음에 폭탄이 떨어지는 이라크 시의 장면이 보여지고, <슈퍼 사이즈 미>에서 로널드 맥도널드는 이제 머리가 다 벗겨진 아편쟁이나 사악한 신의 피에로처럼 우리를 쳐다본다. 맥도널드 햄버거와 스펄록의 구토가 연합되어질 때, 이건 분명히 소비에트 몽타주식의 관객 조작 기법이다. 마이클 무어와 스펄록은 일찌감치 다큐의 미학을 포기하고 부시나 햄버거의 ‘햄’자만 봐도 진저리를 치게 하는 쪽을 택한다. 게다가 무언가 즐길 게 있다면 더욱더 금상첨화이다. 다큐멘터리가 이렇게 웃겨도 좋을까? 혹 작가가 자기가 찍고 있는 대상에 대한 예의나 애정 대신 조롱과 비판을 퍼붓는 이들 다큐들은 다큐의 중립정신을 포기한 퍽큐멘터리는 아닐까? 6만5천달러가 안 되는 돈으로 전세계적으로 30억원을 벌어들인 <슈퍼 사이즈 미>는 이 지점에서 그 가능성보다 한계가 더 많이 노출되는 지점으로 스스로를 몰고 나간다.

<슈퍼 사이즈 미>를 보며 가장 아쉬운 점은, 개인적으로 다큐뿐 아니라 미국이란 나라가 만들어내는 담론을 보면서 항상 아쉬운 점이기도 하지만 실용성에 근거한 저 철저한 미국식 터널 비전 같은 것이다. 정신분석 이론 같은 거대 담론도 바다 건너 미국으로 건너가기만 하면 환자를 어떻게 치료하는가 이 신성하고도 유용한 방법론 외에 별 다른 산출물이 없어진다. <슈퍼 사이즈 미>도 마찬가지다. 이 다큐는 철저히 햄버거 권하는 사회와 맥도널드 때리기에 기진맥진한 나머지 햄버거 속에 눌린 불온한 상상력을 증발시켜버린다. 빅맥 그곳에는 깨 뿌린 빵에 두개의 쇠고기 패티, 특별한 양념소스, 상추, 치즈, 양파, 피클과 함께 계급적 불평등과 인종적 부당함과 감상적 미국주의 옹호하기가 함께 눌려 있다.

정작 ‘패스트푸드’ 자체에 대한 성찰은 빠져있어

조지 리처나 에릭 슐로처 같은 학자가 지적한 것처럼, 맥도널드는 전 지구상 여섯개 대륙에 100개가 넘는 나라에 3만개의 레스토랑을 가진 기업이자 일종의 사회적 아이콘이다. 맥도널드를 먹는다는 것은, 패스트푸드를 먹는다는 것은 욕망과 경험의 동시성을 경험하는 것이다. 이 욕망과 경험의 동시성이 바로 근대화의 환영이 주는 핵심이기도 하다. 우리는 맥도널드 햄버거를 먹는 것이 아니라 ‘햄버거를 먹는 체험’을 한다. 맥도널드는 자신의 브랜드를 현대화의 상징으로 선전하고, 소비자는 그에 맞추어 자신이 전근대적인 사회에서 벗어났다는 상징으로 햄버거를 소비한다. 중국에서 맥도널드나 KFC에 간다는 것은 비싸고 근사한 음식점에 간다는 뜻이고 우리나라 경우도 동네 중국집 같은 패스트푸드점이 패밀리 레스토랑이란 이름으로 격상되어진다. 그리하여 욕망하는 즉시 자신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음식들은 기존의 가정 음식이나 그 나라의 전통 음식이 갖는 느린 속도에서 스스로를 단절시킨다. 일종의 탈문화화 (deculturalization)로서의 패스트푸드의 경험은 일본과 한국의 아이들에게 젓가락질 하는 방법을 서서히 잊어버리게 만들고, 요리의 본고장인 프랑스에서도 샹젤리제 거리와 베르사유 궁전 앞에 맥도널드 포장지를 휘날리게 만드는 것이다. <슈퍼 사이즈 미>에는 이러한 성찰이 통째로 빠져 있다. 마이클 무어라면 맥도널드 사장에게 가서 “당신 아이에게도 삼시 세끼 맥도널드를 먹이겠는가?”라고 말하고, 누군가는 먹고 굶고 빼겠지만, 이것은 몸만으로는 때울 수 없는 거시적인 비전의 결여이기도 하다. 분명 <슈퍼 사이즈 미>는 슈퍼 사이즈 메뉴를 없앴다. 그러나 무언가 이루었다는 미국식 실용주의에 만족하면서 영화는 ‘사이즈’가 미국을 죽였다는 수수한 고찰에서 이윽고 생각의 수레바퀴를 멈춘다.

로마인들은 납중독에 의해서 죽어갔다. 적어도 그렇다는 설이 있다. 수도관을 파고 스스로를 문명인, 제국의 시민이라는 자아도취 속에서 빠져 있었던 로마인들은 그들도 모르는 사이에 전염병처럼 돌아다녔던 납에 의해서 망했다는 것이다. 아마도 <슈퍼 사이즈 미>를 보면서 들지 않을 수 없는 생각은 미국은 어쩌면 비만에 의해서 멸망하는 최초의 제국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모건 스펄록은 <필름 메이커>와의 인터뷰에서 ‘왜 미국 사람들이 비만으로 고생하는가?’라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아마도 우리 스스로가 우리 스스로를 보살피는 것을 까먹은 것 같다. 자신을 돌보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무엇이든 다르게 만드는 게 중요해졌기 때문이 아닐까”라고. 그리곤 덧붙인다. “미국 사람들은 음식 속으로 다이빙합니다. 기분이 안 좋거나 일에 우정에 개인적 관계에 문제가 있을 경우 먹음으로써 잊어버리려 들지요.” 구강기에 고착한 미국을 소니 PD-150 카메라 한대로 담아낸 이 사나이는 DV 한대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하겠다고 대답한다. 자 그러니 인생보다 더 뚱뚱한, 인생보다 더 큰 문제가 있다면 누구든 나서자.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미 허기를 면하기 위해 맥도널드에서 똑같은 햄버거 100개를 훔쳐 똑같은 100개의 햄버거를 먹는 <빵가게 습격>이란 소설을 썼지만, 아마도 히치콕이 지금 미국에서 살아 있다면 DV 카메라 한대를 들고 <너무 많이 안 사나이> 대신 <너무 많이 먹은 사나이>를 찍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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