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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기독교 근본주의, <주홍글씨>
2004-12-02
글 : 황진미 (영화칼럼니스트)
남성중심주의, 이성애 중심주의를 설파하는 영화

나는 <주홍글씨>가 사랑과 결혼에 대한 우리사회의 갈팡질팡하는 가치판단을 반영하고 있기에 ‘리얼’하다는 신윤동욱의 입장(<씨네 21>478호)에 반대한다. 영화가 반영하고 있는 것은 ‘우리사회의 애매한 가치판단’이 아니라, ‘감독의 확고한 가치판단’이며, 그 가치관은 우리사회의 가치관보다 더 남성중심적이고, 심지어 19세기 소설<주홍글씨>보다 더 수구적이다. 영화는 ‘죄’와 ‘벌’의 구도를 빌어, 기독교 근본주의의 성정치학을 설파한다.

그를 중심으로 팔일무(八佾舞)를 추는 그녀들 : 남성중심주의

첫 장면부터 아예 대놓고 ‘원죄론’을 읊어댄다. ‘여자가 그 나무를 봄 즉 먹음직도 하고...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남편에게도 주매.....’ 그리고 다음 나레이션, ‘모든 유혹은 재밌다....왜 피하겠는가.’ 자, 뭔 소리를 하겠다는 건가? ‘인간(남자)’가 ‘유혹’에 빠져 ‘죄’를 짓는 과정을 보여주겠다는 직접적인 언표이다. 포스터가 드러내듯 영화는 기훈을 중심으로 세 명의 여자를 빙 둘러 배치한다. 그녀들은 기훈의 사적인 생활을 담지하는 아내와 정부이며 그가 공적인 생활에서 만난 피의자이다. 세 명의 여자들은 오직 기훈이라는 남자를 통해서만 이 자리에 놓인다. 즉 기훈이라는 왕을 중심으로 팔일무(八佾舞)를 추는 무희들이다.

아내는 예술의 전당에서 독주회를 할만큼 대단한 예술가이지만, 그에게는 아침밥을 챙겨주고 임신의 단꿈에 빠져 있는 순종적인 아내로 재현된다. 놀랄만한 재현의 정치학이다. 결혼 전부터 애인이었던 정부는 그의 결혼을 묵인하였으며, 그 후로도 쭈욱~ ‘베리 럭셔리’한 공간을 보유한 채, 언제든 그가 왔다갔다할 수 있도록 온전히 그에게 열려있다(다른 애인도 없다). 임신했다고 투정 부리다가도 금새 “사랑해, 너무 사랑해” 고양이처럼 안겨온다. 놀랄만한 남성 판타지이다. 그뿐인가? 살인사건 수사라는 어려운 공적 업무도 그에게는 나른한 유혹을 즐기는 일일뿐이다. 경희는 묘한 분위기를 풍기며 그에게 말을 붙여온다. “그거 아세요?...참, 심심해요.” 그는 피의자인 그녀를 놓고, 온갖 성적 상상을 즐긴다. 사진 작가와의 체위는 어땠을까? 그럼 나하고 하면 어떨까? 살인사건 현장에 밤에 몰래와 피의자와의 섹스를 상상하는 형사라니! 언제 어떻게 만난 여자이든 모조리 성애화 시켜내고야 마는 이 놀라운 남성중심주의를 보라! 영화는 기훈이 그의 주변의 여자들을 향해 품는 온갖 유아론(唯我論)적인 망상의 총화이다. 아내는 순종적이라야 하고, 정부는 죽도록 나만 사랑해야하며, 무릇 공적으로 만나는 여자들도 모두 야시시한 추파를 던져야하는 것이다.

그가 이토록 특권적 지위를 점하는 이유는 뭔가? 남성 성기와 총을 지닌 존재, 즉 팔루스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사적인 관계에서는 그의 성기가, 공적인 관계에서는 그의 총이 모든 사태의 중심이 된다. (그는 자신의 성적매력과 총이 존재의 근간이라는 것을 알고, 닦고 조이고 기름친다. 사건현장에서도 거울을 보고 경찰서 복도에서도 머리를 빗으며, 쉴 땐 총을 조립한다.) 그의 성기는 대단한 마력을 지녔다. 오죽하면 레즈비언이었던 두 여자의 욕망마저도 그의 성기 아래 완전히 복속된다.

레즈비언이었다면서 그녀들의 욕망은 어디로 갔나? : 이성애중심주의

영화가 반전이랍시고 제시한 동성애는 이 영화의 저열한 성정치학을 완전히 ‘아웃팅’ 한다. 말인 즉, 레즈비언인 두 여자의 농밀한 관계에 그가 끼었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두 여자의 지난한 애증은 다 어디로 증발해버렸나? 남성을 필요치 않는 레즈비언의 존재는 그 자체로 남근중심주의를 뒤흔드는 전위이다. 남자의 사랑을 원치 않고 자기들끼리 좋아하는 여자들의 존재는 남성들에게 새로운 의미의 거세공포이다. (이 공포를 떨치기 위하여 우리사회는 레즈비언을 과도하게 성애화시켜 포르노 속에서 관음하거나, 탈성애화시켜 ‘소녀들의 우정’으로 은폐하는 전략을 취한다.) 그런데 레즈비언이었던 그녀들마저 기훈의 대단한 성기 맛을 본 후, 레즈비언적 욕망과 그녀들간의 직접적인 애증을 모조리 철회하고, 오로지 기훈과 그로 표상되는 가부장적 결혼관계를 열망하며, 기훈을 통해서만 매게되고 번역되는 본처와 애첩의 자리에서 아옹다옹 인정투쟁을 벌이고 있다는 것이다.

<주홍글씨>는 동성애를 세 번 죽이는 영화이다. 동성애를 신(神) 앞에 엄숙히 고해해야 하는 중죄로, (미장원에서 게이로 암시되는 미용사에게 기훈이 모멸적인 키스를 감행하는 장면에서 보여주듯) 동성애자를 함부로 조롱해도 되는 존재로 그린 것도 모욕이지만, 진짜 모욕은 따로 있다. 영화는 두 여자의 관계를 통해 동성애가 진지한 감정이거나 고유한 성적취향이 아니라, 이성애와 그 혜택인 결혼관계 앞에서 언제든 입장철회 되는 별 볼일 없는 욕망이며, 청소년기에 잠깐의 ‘유혹’에 의해 저지르는 ‘일탈’로 규정하고 있다. 이는 우리사회의 보수적인 법체계가 고수하는 입장과 같다. (동성애를 단속하는 유일한 법규정은 ‘청소년보호법 시행령7조, 청소년 유해 매체물 심의기준 별표’이다.) 동성애에 대한 통념은 이미 변하고 있지만, 이를 반영치 못하는 국가법과 기독교 근본주의의 율법을 이 영화가 암송하는 것이다. (신윤동욱이 글의 말미에 언급한 관객의 짜증은 즉자적인 ‘호모 포비아’ 반응이 아니라, 이해도 못한 동성애를 반전의 도구로 써먹는 영화의 천박함을 개탄하는 소리이다.)

벌은 누구에게 어떻게 떨어지나? 우주의 중심인 그를 기준으로 형량하다

동성애라는 관계 역전의 초강수를 두고도 영화가 취하고 있는 ‘중심-남자, 주변-여자’의 구도는 전혀 변하지 않는다. 동성애는 키취적인 몇 장면으로 지나가고 ‘알고 보니 핵심’이었다던 그녀들 간의 감정은 곧 ‘포커스 아웃’된다. 동성애든 이성애든 결혼관계 외부의 욕망은 그저 ‘죄’로 규정되고, 다만 ‘벌’이 예비될 뿐이다. 그런데 그 ‘벌’은 공정하게 내리나? 징벌의 상황에서조차 우주의 중심은 기훈이다. 그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가장 끔찍한 상황이 연출된다. 정숙한 아내가 더러운 레즈비언이었다는 것을 알게되고, 섹시한 정부의 몸뚱이가 썩어 가는 냄새를 꼼짝없이 맡아야 하며, 잡힐 듯 말 듯 감질나던 피의자는 진범이었으면서도 그의 손아귀에서 완전히 벗어났고, 존경받던 후배들에게 개망신 당하고 경찰복 벗음으로써 팔루스를 상실하게 되었다는 것이 이 사건의 전말이다. 왜 가희가 죽고 기훈이 사는가? 기훈이 중심이자 근원이며, 가희는 그를 위해 존재했던 부차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아내는 어찌 되었나? 중요치 않다. 그녀는 정숙함이 부인되었기에 어찌됐든 그에겐 죽은 거나 마찬가지이다. 경희는 남편을 죽일 만큼 미워했었나? 사진작가에 대해 그녀가 품었던 생각은 뭘까? 그것 역시 하나도 중요치 않다. 중요한 건 오직 기훈이 자신의 주변에서 환상의 역할극을 수행하던 인형들을 최악의 방식으로 죄다 잃었다는 것뿐이며, 신(神) 혹은 감독의 살생부는 기훈의 상실을 기준으로 그녀들을 형량했다는 것이다.

19세기 소설<주홍글씨>는 사제와 간통녀의 역전된 윤리를 통해 청교도 남성중심주의의 허구성을 폭로한 작품이었다. 반면 간통의 아이콘으로 ‘주홍글씨’의 제목을 빌어온 이 영화는 ‘간통은 죄다, 특히 여자에게’라는 수구꼴통의 교훈과 ‘남성중심주의’ 및 ‘이성애 중심주의’를 문자그대로 ‘받아쓰기’한다. 19세기 청교도보다 더 심한 21세기 기독교 근본주의에 기가 찰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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