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이스탄불에서 만난 소외와 외로움, <우작>
2004-12-02
글 : 윤효진

키아로스타미와 차이밍량 연상시키는 예술영화 <우작>

45살의 터키 감독 누리 빌게 세일란의 3번째 영화 <우작>은 의외의 조용한 폭로를 담고 있다. 세일란의 이국적인 이스탄불은 세속적인 소외, 깨진 결혼과 예술적인 고뇌의 고요하고 냉랭한 세상으로 영화 속에서 보여진 스칸디나비아를 떠올리게 할지 모른다.

지난해 5월 칸에서 얼마 되지 않은 히트작 중 하나였던 <우작>은 드문 재료로 빚어진 명확한 예술영화이다. 사려 깊게 짜여지고 시각적인 재치로 가득 찬 영화는 여명에 백설 가득한 경관을 가로지르고 있는 한 남자의 사색으로 시작한다. 카메라는 왼쪽으로 돌려져 빈 길을 보여주며 다가오는 차에 신호를 보내는 남자가 다시 스크린에 나타난다. 그리고 초점없이 보여지는 도시 아파트에서의 성교, 얼마 뒤 자동응답기를 통해 들려오는 첫 대사.

<우작>(소원한, 멀리 떨어진)은 한곳에 모이지만 결코 교차되지 않는 삶들에 대한 지각에 근거해 있다. 먼저 등장했던 유스프(마흐무트 에민 토팍)가 부유한 이스탄불 동네의 한 거리에서 기다리고 있을 때 자동차 알람을 건드려 울린다. 자기 마을을 떠나 일을 구하고 있는 그는 연상의 사촌, 수년 전 이스탄불에 와서 사진작가로 변해 있는 투박한 외톨이 마흐무트(무자파 오즈데밀) 집에서 머물고 있다. 소원한 마흐무트는 현대인이다. 그는 자신의 감정으로부터도 멀어져 있고 영화의 제목도 세일란의 의도를 보여준다. 영화는 조심스럽게 짜여져 있고 카메라는 참여자라기보다 관찰자에 머물러 있으며 음악은 빠져 있고 대사없는 긴 장면들이 있다.

사람들간의 거리, 그리고 그 거리를 좁히지 못하는 실패가 강조되고 있다. 창백한 빛과 변함없는 한기가 넘쳐흐른다. 사촌간의 관계는 이해하기 힘들지만 까다로운 마흐무트가 집에 들어와 신세지고 있는 이 둔한 시골뜨기를 곧 참기 힘들어 할 거라는 건 분명하다. 사실 이 서울내기와 그의 시골 사촌은 몇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둘 다 아픈 어머니가 있고 거리의 여자들을 쫓아다니며 고독하게 살고 서로를 아주 싫어하게 된다는 것. 마흐무트는 유스프를 자기의 보조로 고용해 아나톨리아의 임무를 수행하러 가는데 뻔하게도 일이 잘 안 된다(이 여행은 영화감독이 다큐멘터리를 만들기 위해 아나톨리아의 마을에 돌아오게 되는 세일란의 2000년 <5월의 구름>을 기억하게 한다).

세일란은 여러 번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에 대해 언급한다. (유스프가 밤을 맞아 들어오면 곧 포르노 채널로 돌려버리지만) 마흐무트는 뚱한 채 <스토커>와 <솔라리스>를 보고 있다. 하지만 <우작>은 시각적 신비주의와는 전혀 반대에 놓여 있다. 영화는 단단하고 보석과도 같은 특성을 보여준다. 세일란이 사용하는 반복과 익살스런 절제는 동시대의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나 차이밍량과 가장 비슷한데 이 둘은 오래된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시네 모더니즘을 아시아의 도심으로 옮겨놓았다. 마흐무트의 직업은 안토니오니의 <욕망>을 떠올리게도 하지만 세일란 자신이 사진작가였다는 <우작>이 가지고 있는 자서전적 서브텍스트와 더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의 어머니가 마흐무트의 어머니 역을 맡고 있고 <5월의 구름>에도 나왔던 토팍은 실제 그의 사촌이다. 영화가 완성된 지 얼마 뒤 토팍이 자동차 사고로 죽어 그의 연기에 의도되지 않았던 비극적 깊이가 느껴진다.

성가신 쥐와 사라진 시계로 이야기를 쌓아가는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서 <우작>은 무언가로 유착된다. 하지만 그 무언가가 무엇일까? 순진한 유스프는 외국으로 가고 싶어하지만 그럴 만한 직장을 잡을 수가 없고 마흐무트의 전 아내는 새 남편과 캐나다로 이민가려 하고 마흐무트는 또 다른 여자를 사귀지 못하며 돈을 벌지 못해 불행해한다. 과연 상실과 공허함에 대한 풍요롭고 만족스러운 영화를 만드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 뉴욕필름페스티벌에서 상영된 <우작>에 대해 <뉴욕타임스>는 따분하다고 평했다. 역시 뉴욕필름페스티벌에서 상영된 자파르 파나히의 비교적 고상하고 담담하며 노련한 <붉은 황금>처럼 관중을 끄는 데는 <우작>도 실패할 것이다(지정학적 중요성을 생각하면 터키와 이란은 미국인들의 흥미를 끌어야 할 텐데도 데이비드 덴비(<뉴요커>의 영화평론가- 역주)가 수년 전 키아로스타미를 귀찮다며 무시했듯 우리의 교육받은 중산층은 이들에게 거의 관심이 없다).

<우작>은 그 존재 자체로도 참으로 정치적이다. 마흐무트의 의무적이고 아무 이유없는 공항으로의 여행은 지나쳐가는 사람들에 대한 경의이다. 사람들은 그의 삶에서 단지 사라져간다. 얼어 있는 항구에서 지나가는 배를 바라보는 사진작가의 서정적인 마지막 이미지는 일종의 제물이다. 환대받지 못한 그의 손님이 남겨놓은 담배를 그는 추위에 떨면서 떨면서 태우고 있다.

(2004. 3. 10. 짐 호버먼은 미국 영화평단에서 대안영화의 옹호자로 가장 명망이 높은 평론가로 <빌리지 보이스>에 기고하고 있습니다. <씨네21>과 <빌리지 보이스>는 기사교류 관계에 있습니다.)

번역 이담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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