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를 갔다와야 진짜 남자가 되지.’ 전투력강화를 위해 국방부에서 흘린 말인지, 살기 힘든데 밥 한 공기라도 줄이겠다는 부모님의 의지인지, 아니면 나만 고생할 수는 없다는 억울한 예비역들의 외침인지는 알수 없지만 공공연히 떠도는 이 검증되지 않은 논리를 온몸으로 증명해보이는 사람이 있다. 이 얼굴을 보자. 올해 1월16일자로 26개월간의 꽉 채운 군대생활을 끝내고 스크린을 향해 전역신고하는 진한 눈썹의 구릿빛 청년. 이름은 이종수다. 나이는 스물여섯이다. ‘수학여행이란 단어가 생긴 이래 가장 처절했던 싸움으로 기록되는’ 그날의 그 사건을 소개하는 경주사투리의 주인공. 경찰보다 더 무시무시한 누나 덕에 맷집 하나는 단련된 <신라의 달밤>의 고교 문제아 ‘주섭’이 이종수가 군대에서 돌아오자마자 처음 품어야 하는 인물이었다. “제대 변신한 모습을 보여야겠다는 생각이 왜 없었겠어요. 근데 제 역할을 떠나 시나리오가 너무 재미있더라고요.” 결국 그는 ‘고등학생은 이번이 마지막’이란 결심을 굳혔고, 껑충한 영구표 앞머리에 오로지 ‘의기’만 ‘충천’한 오합지졸들을 거느린 ‘토착 고삐리 짱’ 주섭이 되기 위해 경주로 내려갈 3개월치 짐을 꾸렸다.
사실 이종수는 어느날 CF 하나 찍고 ‘오! 쟤 이미지 좋은데…” 해서 발탁된 행운의 주인공이 아니다. 고등학교 시절 오로지 배우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4500원짜리 촬영장 엑스트라로 2년 반 동안 출근했고, 졸업 뒤 95년 탤런트 공채에 합격했지만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성재를 “성재야”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 역시 공채 동기여서이다) 정말로 ‘별볼일’이 없었다. 이름없는 단역은 고사하고 오징어가면 쓰고 난동피우는 함진아비 정도면 양반이었다.
그나마 2년 만에 <짝>이란 드라마에 채림을 졸졸 쫓아다니던 ‘귀여운 재수생’으로 등장하면서 겨우 ‘저런 애가 있구나’ 정도 얼굴을 알릴 수 있었다. 이후 영화 <체인지>를 거쳐 <세상끝까지>, 유승준의 <나나나> 뮤직비디오 등을 통해 뜨거운 인기는 아니었지만 소위 ‘조금만 더 버티면 될 것 같은’ 찰나. 이종수는 홀연히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군대갈 나이가 됐는데 안 가고 있으니 의심스런 눈초리로 보는 분들이 있었어요. 물론 아는 사람들은 다 말렸죠. 여기까지 오는 것도 얼마나 힘들었는데 지금 가냐고…. 하지만 자신있었어요. 군대 다녀와서 더 잘할 자신이….”
“2년2개월 동안은 철저하게 칼을 가는 시간이었어요.” 오직 세상 밖으로 나가기만 기다렸던 그 칼을 처음 빼어든 영화의 시사회가 열리던 날. 이종수는 “투혼을 바쳤다며” 군대식으로 꾸뻑 인사는 했지만 “정말 아무 생각도 안 나” 극장 밖 복도에서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그리고 영화가 시작되고 문 사이로 간간이 터져나오는 웃음소리를 듣는 순간 비로소 그는 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저는 잡초처럼 큰 놈이에요. 온갖 무시 다 받으면서 바닥에서 한 계단 한 계단 올라온 놈이기 때문에 앞으로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쉽게 꺾이진 않을 거예요.” 한 차례 긴 마라톤을 끝내고 이제 인생의새로운 스타트라인 앞에 서 있는 루키 이종수. 그에게 앞으로 다가올 허들은 두려운 존재가 아니라 그저 넘어야 할 장애물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