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체라가 죽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가 눈을 뜨자 참호 안에는 동료 치키와 적군 니노가 티격태격하고 있다. 양 진영의 총과 포과 노려보고 있는 참호를 빠져나가기 위해선 서로 필요하니 죽이진 못하고 꼴사납게 잘잘못을 따지고 있는 것이다. 상처는 깊고 대변은 급하며 몸은 꼼짝할 수 없는데 전우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임시 휴전이 선언되고, 유엔 평화유지군이 지뢰해체반과 함께 뉴스에 굶주린 기자들을 몰고 왔을 때, 체라의 불운은 끝나가는 듯했다. 그러나 그게 시작이었다.
보스니아 출신 다니스 타노비치가 감독하고 유럽 6개국이 제작에 참여한(제작자 중 한명이 현 베니스영화제 집행위원장 마르코 뮐러다) <노맨스 랜드>는 30만명이 학살된 전쟁이 배경이지만 음울하거나 비장하기는커녕 우스꽝스럽고 경쾌하다. 그리고 냉소적이다. 여기엔 전쟁영화의 스펙터클도 없고 감상적인 휴머니즘도 없다. 뛰어난 연극이 그러하듯 여러겹의 아이러니가 중첩된 이야기는 교묘하고 능수능란하며 무대는 참호라는 한정된 공간을 벗어나지 않는데도 극적 긴장은 이완되지 않는다.
<노맨스 랜드>는 전쟁영화가 아니라 심리적 동일시 효과를 배제한 시추에이션 드라마이며, 아이러니의 미로에 갇힌 인물들이 벌이는 부조리극이다. 인물들이 맞이한 가장 잔인한 아이러니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 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위험을 벗어나기 위해선 적의 협력이 불가피하며, 다국적 평화유지군이 왔을 때 치키에게 그들의 말을 통역해 줄 사람은 니노 뿐이다. 무대에 등장인물들이 늘어날수록 아이러니의 골은 더 깊어진다. 여기엔 영웅도 반영웅도 없다. 아무도 반성하지 않고 고뇌하지 않으며, 상황은 갈수록 나빠진다. 상황의 관성을 거스르는 유일한 인물이 유엔 평화유지군에 속한 프랑스 중사 미셸이다. 그는 모든 등장인물들 중에서 가장 긍정적이고 주체적인 인물이다. 그의 장갑차가 문제의 참호에 도착할 때 극단적인 앙각으로 촬영된 그 이미지는 구원자처럼 느껴진다.
이 영화의 감독이 보스니아의 종군 다큐멘터리스트 출신이라는 점을 상기하면 이건 참으로 이상한 점이다. 혹시 타노비치 감독은 전쟁을 벌이고 있는 자신들이 아니라 유럽공동체 정신에 일말의 희망의 있다고 믿는 걸까. 천만의 말씀이다. 이건 트릭이다. 미셸의 온정이야말로 체라의 불행을 대단원으로 이끈다. 유럽공동체 정신? 웃기는 소리다. 용기있고 정의로운 미셸은 곤경에 처한 단 한명의 병사를 구하는 데도 실패한다.
전쟁 당사자들은 여전히 총부리를 겨누고 있고, 유럽인들은 그들의 거짓된 기여를 자축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을 때, 체라는 누구도 해체할 수 없다는 지뢰 위에서 살 수도 죽을 수도 없는 시간을 견뎌내고 있을 것이다. 그 지뢰를 만든 건 EU다. <노맨스 랜드>는 냉소적이다 못해 삭막하고 잔인한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