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파리. 노인이 된 라울 드 샤니 백작은 파리 오페라극장 소장품을 판매하는 경매장을 찾는다. 극장 지하에서 발견된, 아직도 멜로디가 흘러나오는 낡은 뮤직박스를 산 백작은, 위험한 열정과 광기가 지배하고 있던 옛 오페라극장을 추억한다. 유명한 서곡과 함께 과거로 질주하는 <오페라의 유령>. 1870년대 파리, 젊은 오페라 가수 크리스틴(에미 로섬)은 제멋대로 화를 내고 공연을 그만둔 프리마돈나 카를로타(미니 드라이버)를 대신해서 주연으로 무대에 서게 된다. 아버지를 잃고 오페라단 기숙사에서 자란 그녀는 ‘오페라의 유령’이라고 불리는 신비스러운 남자(제라드 버틀러)로부터 오랫동안 수업을 받아왔다. 유령처럼 극장 지하에 은둔한, 얼굴없는 지배자 팬텀. 크리스틴을 사랑하는 팬텀은 추악한 외모 때문에 목소리만으로 자신을 드러내왔지만, 크리스틴의 소꿉친구이자 극장의 새로운 후원자인 라울 자작(패트릭 윌슨)이 연적으로 나타나자, 분노와 질투에 이성을 잃기 시작한다. 자신의 음악과 사랑을 향한 팬텀의 집착은 살인을 부르고 오페라극장을 파멸로 이끈다.
오래되고 거대한 건물은 침묵하고 있어도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가스통 르루가 파리 오페라극장을 둘러보고 1911년에 펴낸 소설 <오페라의 유령>은 빙산처럼 보이는 부분보다 보이지 않는 부분이 더 매혹적인 건축물 지하로부터 음산하고 낭만적인 스토리를 캐낸 수작이었다. 화려한 무대에서 먼지 쌓인 통로로 빠져나와,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면, 오르간과 밀랍인형이 웅크린 동굴에까지 이르는, 또 하나의 세계가 있는 것이다. 뮤지컬의 도입부를 좀더 대규모로 재현한 <오페라의 유령> 첫 부분은 오페라 극장을 뒤덮은 회색 세월의 흔적을 순식간에 걷어내면서 고속철도와 같은 속도로 샹들리에 불빛이 빛나는 전성기를 돌이킨다. 그 순간이 마법과도 같은 것은, 1년 넘게 공들인 컴퓨터그래픽의 힘이라기보다, 건축물 자체에 밴 향수 때문일 것이다. 증오로 살아남았고 사랑으로 파멸한 한 남자의 드라마가 그곳에 잠들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관객은 눈앞에서 좋았던 시절로 돌아가고 있는 오페라극장을 보면서, 그리고 힘있고 비극적인 음악을 들으면서, 기꺼이 고풍스러운 러브스토리에 공감할 준비를 하게 된다.
그 때문인지 이 영화는 유독 세트에 공을 쏟았다. 닐 조던과 몇편의 영화를 함께한 영국 출신 디자이너 앤서니 프랫은 뮤지컬 무대를 기본으로 삼았고, 19세기 말엽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비슷한 시대에 활동했던 드가와 서전트, 카이유보트의 그림을 참고했다. 40주에 걸친 제작기간과 8개의 세트, 철근 73톤, 페인트 1500리터. 그 엄청난 물량은 고딕호러의 잔재가 남아 있는 원작소설과 천상과 지옥을 넘나드는 에너지를 간직한 뮤지컬을 스크린 위에 황금빛으로 실어나른다. 그것은 또한 슬픔이기도 하다. 불타버린 오페라극장, 비단 휘장이 사라지고 거미줄로 천장을 덮은 무대를 이미 보았기 때문에, 찬란한 두 시간은 죽은 연인을 찍은 생전의 필름을 돌리는 것처럼 애잔하다. 슈마허는 뮤지컬과 달리 늙은 샤니 백작과 오페라 안무가 마담 쥐리가 눈길을 부딪치는 흑백영상을 막을 나누는 커튼 대신 사용해서 회한에 한겹 깊은 쓸쓸한 기운을 불어넣었다. 새로 생겨난, 크리스틴과 라울의 어린 시절이나 빅토리아 시대로 돌아간 듯한 공동묘지 장면도, 한겨울 판타지처럼, 안개처럼, 차고 흐린 입김 자국을 이 영화에 남긴다.
웅장한 비극이라 할 만한 정조가 내려앉은 <오페라의 유령>은 인간이 가진 극단의 감정을 오가는 드라마고, 어쩔 수 없이 어느 정도는 과잉이다. 관객과 물리적인 거리를 두고 있는 뮤지컬이나 연극은 그런 과잉을 스크린으로 여과되지 않은, 악단과 배우가 직접 뿜어내는 에너지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 <오페라의 유령>은 뮤지컬이 가지고 있는 노래와 춤과 연기의 에너지가 평면에 못박혀 있는 상태에서도 그런 과잉을 다듬지 않고 곧이곧대로 따라할 뿐이다. 대형 오케스트라를 동원해 사운드를 보강한 음악도 가라앉을 줄 모르고 들뜨기만 하는 이 영화에 생명을 주기엔 힘이 모자라다. 오래전부터 <오페라의 유령>을 영화로 만들고 싶어했던 앤드루 로이드 웨버는 크리스틴으로 스타가 된 동반자 사라 브라이트만과 이혼하면서 주춤했지만, <시카고> <물랑루즈> 같은 뮤지컬영화들의 성공으로 힘을 얻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영화는 미니멀한 뮤지컬을 떠들썩하게 각색해 그 자체로 하나의 창작물이 된 <시카고>의 독창성은 따라가지 못했다. 영화 <오페라의 유령>은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는 점과 뮤지컬보다 훨씬 싸게 볼 수 있다는 점 정도가 존재의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가스통 르루의 소설 <오페라의 유령>
독특한 문체에 담긴 느슨하고 풍성한 이야기
가스통 르루는 밀실살인을 다룬 추리소설 <노란방의 비밀>로 지명도 있는 작가가 되었다. 법정취재가 전문인 저널리스트였던 가스통 르루는 그 경력 때문에 사건을 지켜본 기자가 실화를 기록하는 듯한 독특한 문체와 형식을 좋아했고, 방대한 이야기를 엮은 <오페라의 유령>도 비슷한 형식을 취했다. <오페라의 유령>은 가스통 르루가 파리 오페라극장과 그 지하를 둘러보고 난 뒤에 썼던 소설. 1861년 건축을 시작했지만 보불전쟁과 파리 코뮌을 겪으면서 1875년에야 정식으로 문을 연 오페라극장은 복잡한 구조와 그에 얽힌 뜬소문, 코뮌 당시 시민군 무기고로 사용됐던 전력 때문에 소설의 소재로 적당했을 것이다. 소설 <오페라의 유령>은 뮤지컬보다 느슨하고 풍성한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화자는 사람들이 전설로 믿고 있는 ‘오페라의 유령’이 에릭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던 실제 인물이었다고 운을 뗀다. 그리고 크리스틴을 지켜보는 에릭의 사랑, 연적 라울을 향해 불태웠던 그의 분노, 추악한 얼굴을 가렸던 가면만 남기고 사라진 그의 최후를 읊어간다. 20세기 초엽 소설답게 자주 딴 길로 빠지곤 하는 <오페라의 유령>은 페르시아 인이라고 불리는 조력자를 내세워서 뮤지컬에는 없고 영화는 각색한 에릭의 과거를 들려준다. 정교한 궁정을 건설할 정도로 천재였던 에릭은 해골처럼 얇은 피부와 구멍만 남아 있는 코, 지옥 같은 눈동자 때문에 어머니조차 입맞추기를 거절한 저주받은 남자였다. 그는 자신에게 입을 맞추어준 단 한명 크리스틴 때문에 증오만 남아 있던 마음을 돌이키고 홀로 사라진다. 자신을 선택한 크리스틴을 거절하는 그 결말이 뮤지컬과 영화와는 다른 부분. 그리고 그의 죽음을 알리는 짤막한 사망기사가 에필로그처럼 덧붙여진다. 모두 열여섯편의 소설을 쓴 가스통 르루는 론 채니 주연의 무성영화 외에도 수없이 영화와 TV물로 만들어진 <오페라의 유령>을 남겼지만, 정작 그의 자신은 재능에 비해 인정받지 못하는 쓸쓸한 삶을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