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브리짓 존스의 일기2: 열정과 애정>과 세 배우 [4] - 휴 그랜트
2004-12-07
글 : 박은영
휴 그랜트 인터뷰 “이 역할은 나에게 경고하는 것 같다”

<노팅힐>에서 줄리아 로버츠는 휴 그랜트와의 데이트 시간을 벌기 위해 프레스 정킷에 그를 초대하고, 그는 <말과 사냥개>라는 잡지의 기자로 둔갑해 “영화에 말은 나오나요?” 같은 어이없는 질문으로 시간을 때우고 나간다. 그보다 덜 낭만적이더라도, 덜 허무한 시간이 되길 기원하고 있는데, 생각보다 젊고 늘씬한, 하지만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휴 그랜트가 들어섰다. 프레스 정킷의 다경험자으로서, 휴 그랜트는 나름의 비교 분석 데이터를 갖고 있었다. 해외 기자단은 괜찮은 편이고, 최악은 미국 TV 인터뷰라고, 그가 운을 뗐다. 하지만, 그 통계를 비웃기라도 하듯, 맥락없고 사소한 질문들이 쏟아져나왔다. 놀라운 건 휴 그랜트의 반응이었다. 턱을 당기고, 눈을 치켜뜨고, 이마에 주름을 잡은, 예의 그 얼굴은 편안한 듯 무심한 듯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는 아무 동요없이, 앞뒤 재지 않고, 생각나는 대로 이야기했다. 인터뷰 말미에 ‘열심히 살고 싶다’고 했던 그가 최근 ‘은퇴 선언’을 했다는 소문이 들려온다. 그가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인 걸까, 아님 언론이 경솔하고 과민한 걸까.

-다니엘 클리버가 실제 당신과 많이 닮았다고들 한다.

=비슷한 취향에 비슷한 결함이 있긴 하지만, 나는 그렇게 음침한 영혼은 아니다. 하지만 내가 그런 식으로 생을 마칠 수도 있다고 경고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는 한다. 만약 내가 조금 더 막 나간다면, 그러니까 내 취향을 그런 식(다니엘 클리버식)으로 밀어붙인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그가 싫지는 않다. 그처럼 솔직한 것을 좋아하거든.

-플레이보이 이미지가 강해서 그런 것 같다.

=그런가? 난 몰랐다. 그렇다면, 좋은 거 아닌가? 불편한 건 없다. (정착에 대한 질문이 이어지자) 제도 자체엔 회의적이지만, 아이들에겐 부모가 있어야 하니까 결혼제도가 필요할 것 같긴 하다. 나? 현재로선 결혼 계획은 없다.

-속편 출연을 망설였다면, 어떤 이유에서였나.

=다시 이 역할을 맡는 데 대해서 처음엔 썩 내키지 않았다. 나는 이 역할에 뭔가 더 지적인 면을 가미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행히 내 친구인 리처드 커티스는 나름대로 새롭고 재미난 각본을 넘겨주었다. 다니엘이 남의 등쳐먹고 사기나 치는, 그런 평면적인 악한으로 그려지지 않은 것 같아서 응하게 됐다. 헬렌 필딩하고도 친한 사이여서, 내 의견을 제시했고, 반영된 부분도 있다.

-또 다시 격투신이 등장한다.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서로 미워하는 마음을 잔뜩 키우고 나서, 슛 사인과 함께 아주 거칠게 달려들었다. 11월에 촬영했기 때문에 아주 추웠고, 그래서 둘이 부둥켜안고 싸우다가, 틈만 나면 옆에 있던 온탕에 들어가 몸을 녹였다.

-당신은 좋은 남자와 나쁜 남자, 극과 극의 캐릭터를 오간다. 좀더 현실적인 역할을 해보고픈 생각은 없나.

=영화에서 리얼리티를 따지는 건 적절하지 않다. <러브 액츄얼리>의 영국 총리 역할은 너무 근사했고, <브리짓 존스의 일기>에서의 다니엘은 너무 음흉했다. 하지만 이건 로맨틱코미디다! ‘진짜’를 원한다면, 다큐멘터리나 리얼리티 쇼를 보면 된다. 영화의 미덕은 사람들을 환상에 빠지게 하고, 즐겁게 해주고, 감동을 주는 것이다. 리얼리티는 그 다음 문제다. 나는 엔터테이너다.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게 내 역할이다.

-다니엘은 브리짓을 사랑한 걸까. 실제 당신이라면 그런 여성에게 매력을 느끼겠나.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사람에 따라선 브리짓을 섹시하다고 볼 수도 있겠지. 보호본능을 불러일으키고, 매력적인 점도 꽤 있으니까. 물론 다른 종류의 섹시함이긴 하다. 나 역시 통통한 여자들을 좋아하고, 그런 여자들과 어울리기도 하지만, 술 취했을 때만 그러는 편이다. 외모가 중요하지 않다는 남자들의 말을 믿지 않는다. 아마도 다니엘은 브리짓의 외모에 대해 할말이 꽤 많았을 거다. 나는 여자들이 공들여 치장하는 걸 좋아한다. 여자친구들 옷차림에 신경쓰는 편이다. 남자들이 잘 모르는 여자들의 외모 가꾸기 트릭 같은 것들은 모델과 오래 살면(엘리자베스 헐리를 지칭하는 듯) 저절로 알게 된다.

-르네 젤위거와 호흡은 잘 맞았나.

=르네는 멋진 배우다. 내가 문제지. 나는 연기하는 게 정말 끔찍하다. 촬영 현장에서 카메라 위치 바꾸고 세팅 바꾸고 이런저런 상황이 달라지는 것 때문에 항상 신경이 곤두서 있다.

-당신은 파파라치의 타깃이다. 그들에게 어떻게 대처하나.

=눈에 띄지 않으려고, 야구모자를 쓰기도 했지만, 어울리지 않아서 그만뒀다. 자기 일을 열심히 하는 건 물론 좋은 것이지만, 나처럼 오래 당하다보면 발로 차주고 싶어진다.

-할리우드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다.

=난 사실 2개월 이상 할리우드에 머물러본 적이 없다. 할리우드는 별로 아름답지도 않고 매력도 없다. 공격적인 사람들도, 경쟁적인 분위기도, 돈벌이에 혈안인 것도 싫다. 그래서 점점 더 유럽인의 가치를 고수하게 되는 것 같다. 갤러리나 극장 같은 고상한 문화를 말하는 게 아니다. 이탈리아 사람들처럼 대낮에 몇 시간씩 식사하고, 그 시간만큼은 전화기를 꺼두는, 돈 버는 것 외에도 삶의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아는 그런 여유가 필요하다는 거다.

-연기 생활을 오래 했다. 그 사이 연기관이나 가치관이 달라졌다고 느끼나.

=살아가면서 뭐가 가장 중요한지 계산하고 우선권을 두는 데 혼란이 온다. 아, 모르겠다. 정말. 생각이 자꾸 달라진다. 연기를 하면서 부와 명예에 대한 열망이 없다고 말한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식의 열망이 남아 있지 않다. 다른 것들로 대체된 것 같다.

-연기를 하지 않는 다른 시간엔 뭘 하나.

=가끔 독서도 하고, 파티도 자주 가고, 여행도 하고, 골프도 친다. 틈틈이 각본 작업도 하고 있지만, 완성된 건 없다. 내 출연작 중에서 좋은 작품으로 꼽는 <어바웃 어 보이> 이후에, 언젠가 좋은 각본을 완성하겠다고 혼자 다짐했다. 언젠간 그런 날이 오겠지. 연기 말고 각본과 연출을 꿈꿔본 적도 있지만, 그렇게 심각하고 스트레스받는 일을 ‘본격적으로’ 하고픈 생각은 없다.

-다니엘은 브리짓을 만나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했다. 당신도 그렇게 느낀 적이 있나.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었던 때? 늘 그렇지. 언제나 그렇다. 특히 지난 3년간 너무 게으르게 살았다. 일터로 돌아가기 위해 좀더 애를 써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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