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유분함량 제로, 수분함량 100%! <무사>의 주진모
2001-06-27
글 : 백은하 ( <매거진t> 편집장)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누가 그를 느끼하다고 했던가. 미간을 가득 메운 진한 눈썹에, 묵직하고 큰 코, 동양인치고는 꽤나 굵직굵직한 이목구비로 달려온 주진모는, 처음 우리에게 이렇게 물었다. “한 게임 더해?” 농구시합 끝에 땀이 흥건한 모습으로 코트에 누워버린 자양강장제 CF 때문인지, 온몸 흠뻑 젖는 춤을 보여준 <댄스 댄스> 때문인지, 가질 수 없어 더욱 집착적인 사랑을보였던 <해피앤드>의 김일범 때문인지 그간 주진모에 대한 총평은 “잘생겼지만 왠지 모르게 끈적하다”가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지난해 여름, 8명의 고려무사들과 함께 떠났던 <무사>의 1년 만의 귀향길에 만난 주진모는 머난먼 이국땅의 담백한 정기를 한껏 빨아들이고 온 듯했다. 계산하지 않고 내뱉는 솔직한 말투, 부담스럽지 않을 만큼의 다정한 음성, 여전히 고려장군 ‘최정’의 기운이 서려 있는 듯한 호기로운 몸짓. 몇번을 다시 재어보아도 그는 분명 유분함량보다는 수분함량이 놓은 싱싱한 스물여덟 청년이었다.

의(衣)

20kg 정도 되는 갑옷은 너무 꽉 껴서 소화가 안 될 정도였어요. 처음엔 입는 데만 10분, 벗을 때는 5명이 도와줘서 5분 정도? 아, 그래도 화장실 갈 때는 그보다 더 빨라졌어요. (웃음) 나중에 교묘히 구멍을 내서 일을 봤는데 이 꼼꼼한 중국 의상팀이 뜯어진 줄 알고 밤새 기워놨더라고요. 아휴… 1375년 명나라 사신으로 갔다 귀양길에 오르게 된 고려무사들의 악전고투 귀환일지 <무사>에서 주진모는 왕실경호대 용호군의 장군 ‘최정’ 역을 맡았다. “최정은 속마음은 여리고 따뜻한 인물이지만 장군이라는 신분 때문에 속내를 숨긴 채 냉혈한인 척 연기해야 했던 인물이에요.”

캐스팅 단계에서 여솔 역으로 함께 출연한 정우성이 주진모를 추천했고 그는 너무나 존경했던 김성수의 영화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선뜻 “무슨 역인지 물어보지도 않은 채” 출연을 결심했다. “그래도 이렇게 큰 역이라고는 생각 못했어요.” 무리를 이끄는 장군, 최정이 모든 에피소드의 시작을 열어가다보니 그가 한번 방향을 잘못 잡으면 영화 전체가 삼천포로 갈 수 있는 상황.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첫 촬영 끝내고 ‘최정 분량을 줄이자’는 말까지 나왔다고 하더라고요. 많이 긴장했고 갈피를 못 잡았던 게 사실이었어요. 이를 꽉 물었죠. 혼자 시나리오 안고 고민하고 며칠 밤 꼬박 새우기도 하고, 진짜 피곤하고 초췌한 모습으로 카메라 앞에 서기 시작했어요.”

식(食)

음식을 처음엔 한국식으로 먹었는데 자꾸 탈이 났어요. 결국엔 중국 스탭들 먹는 거랑 똑같이 먹었더니 신기하게도 아무렇지도 않더라고요. 인간이 그렇게 살도록 만들어졌나봐요. 그 기후에 맞는 생활과 식습관을 가지도록… 말도 못할 고생은 영화의 내용인 동시에 모든 촬영팀의 생활 그 자체였다. 영상 40도와 영하 20도를 왔다갔다 하는 현장. 발에는 거미와전갈들이 판을 치고, 콧물이 흐르면 닦아낼 필요없이 그대로 고드름이 되어 떼어내기만 해도 되었다는 반년간의 고된 촬영. 처음엔 뺀질뺀질 윤이 나던 얼굴은 점점 초췌해졌고, 꼭 맞아 활동이 불편했던 철갑옷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헐거워지고 있었다. ‘찐득’한 피분장 그대로 4일 내내 샤워도 못하고 촬영을 강행한 적도 다반사. 어느덧 모두 촬영에 ‘취해’ 여기저기 진짜 피가 뚝뚝 흘러도 “어! 간지(느낌)가 훨씬 좋아!”하며 카메라를 더욱 신나게 돌리기도 했다. “촬영이 중반을 넘어가면서부터 그 친구에 대한 마음을 읽겠더라고요. 연기했다기보다, 그저 그냥 내가 최정이 되고보니 눈물도 나고 화도 나고… 순간 3~4일 찍을 신이 한번에 오케이가 나더라고요. 단 10분 망에 찍은 거죠.”

연기에 감을 잡는 순간부터 주진모에게는 한 신을 찍더라도 “이거 편집당하면 안 되는데…”하는 욕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김성수 감독과는 멱살잡고 싸울 만큼 의견충돌을 벌인 적도 많았어요. 사실 감독님은 배우가 자기 의견을 충분히 표현하는 걸 좋아하세요. 결국 이렇게 찍어보고 저렇게도 찍어보고, 두 사람 생각대로 다 찍어보는 거에요. 덕분에 힘은 배로 들었지만 만족스러운 장면이 나온 것 같아요.”

고(苦)

지난해 5월 중순부터 승마, 검술, 체력훈련을 기본적으로 하고 촬영에 들어갔지만 현지에 가보니 한국에서 배운 무술은 ‘우물 안 개구리’ 수준이었어요. 우아하게 타는 ‘승마’가 아니고 끝도 안 보이는 대륙의 모래바람 속에 사정없이 달리는 진짜 ‘말타기’. 많이 떨어지고 다치고… 물론 이젠 눈감고도 타죠. 몸고생이야 모두들 같이했죠. 오죽하면 안성기 선생님이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진모야, 내가 지금껏 100편 넘는 작품을 찍었지만 이렇게 고생한 영화는 생애 처음이다”라고 말씀하셨을까. 하지만 “신인이 처음부터 이런 영화 찍을 수있었던 걸 행운으로 여겨라”는 말씀도 함께 해주셨어요.

모든 촬영을 끝마치고 한국에 돌아오니 이미 크리스마스였다. 과거에서 갑자기 현재로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랄까? 처음엔 적응이 안 되기도 했고, 긴장이 풀어져서인지 드러누워서 일주일 동안 한번도 문 밖을 나가지 않았다. “샤워하려고 알몸을 보니 상처가 20군데도 넘더라고요. 병원가서 치료받고, 낚시도 가고, 그 사이 들어온 시나리오 읽고… 그러다 <와니와 준하>를 보게 되었어요. 잔잔한 느낌도 맘에 들었고 이젠 편안한 역할도 어색하지 않게 할 수 있겠다, 싶더라고요.”

긴 가뭉이 끝나고 하늘에서 촉촉한 단비가 내리던 날. 사랑하는 와니(김희선)의 방황과 아픔을 품을 줄 아는 섬세한 시나리오 작가 준하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 긴 머리를 싹둑 자르고 나타난 주진모. 사막의 모래 바람 속, 건기의 한철을 보낸 그 남자는 어느덧 새로운 우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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