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영화]
바닷가 우체국처럼, <일 포스티노>
2001-06-27

바다가 보이는 언덕 위에

우체국이 있다

나는 며칠 동안 그 마을에 머물면서

옛사랑이 살던 집을 두근거리며 쳐다보듯이

오래오래 우체국을 바라보았다

(……)

그리고 때로 외로울 때는

파도 소리를 우표 속에 그려 넣거나

수평선을 잡아당겼다가 놓았다가 하면서

나도 바닷가 우체국처럼 천천히 늙어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내가 쓴 시 ‘바닷가 우체국’의 일부분이다. 사람들이 이 시를 읽고는 종종 이렇게 묻곤 했다. 영화 <일 포스티노>를 보셨죠? 영화에서 보이는 이탈리아의 한적한 바닷가 풍경과 시의 분위기가 아주 비슷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시를 쓸 때까지만 해도 나는 <일 포스티노>라는 영화를 모르고 있었다.

나는 스스로 게으르다는 핑계로, 또 바쁘다는 이유로 영화를 많이 보지 못했다. 이따금 누군가 좋은 영화를 소개해 주어도 뒤로 미루다가 결국은 번번이 놓치기 일쑤다. 그래서 영화관에 두어 시간 느긋하게 앉아 있을 시간조차 확보하지 못하는 내 인생이 때로는 한심하고, 때로는 원망스러울 때도 있다.

글쓰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으면서도 소설을 읽는 일에도 나는 게으른 편이다. 영화와 소설은 서사라는 뼈대를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장르다. 그런데 영화를 보거나 소설을 읽고 나서 내 아둔한 머리는 그 줄거리를 제대로 저장하지 못한다. 영화관 문을 열고 나와서 머리에 햇빛을 쬐고 나면 그 흥미진진하던 이야기의 줄거리는 봄눈 녹듯 녹아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머릿속에는 영화의 이미지만 실루엣처럼 남는다. 건더기는 사라지고 국물만 남는 격이다.

그래서 아예 나는 영화를 볼 때마다 애써 건더기를 건져먹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국물 떠먹는 맛을 더 즐기고자 한다. <일 포스티노>를 동네 비디오 가게에서 빌려와 처음 보던 날도 나는 황동규의 시 ‘즐거운 편지’를 떠올리고 있었다.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 보리라.”(…)

주인공 마리오 루폴로가 네루다에게 사랑의 시를 써달라고 부탁할 때 문득 그에게 읽어주고 싶었던 시다. 영화를 보면서 줄거리를 따라가지 않고 내 맘대로 이리저리 ‘해찰’을 하는 것, 그것도 영화를 보는 쏠쏠한 재미 중 하나다.

그동안 <일 포스티노> 비디오를 나는 세 차례나 빌려보았다. 그 이유는 이 아름다운 영화 속에 아스라이 문학이 똬리를 틀고 앉아 있기 때문이다. 특히 시란 무엇인가, 에 대한 해답을 이처럼 쉽고도 절실하게 설명해놓은 문학 교과서를 나는 보지 못했다. 학생들에게 시를 가르칠 때 나는 <일 포스티노>를 종종 활용하곤 한다. 수백 마디의 말보다 <일 포스티노>를 함께 보고 토론하면 그것으로 시의 본질에 훨씬 깊숙하게 가닿을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하기도 했다.

시를 공부하면서 은유에 시달려 본 적이 있는 사람들은 이 영화를 보고 몇번이나 무릎을 쳤을지도 모른다. 마리오 루폴로가 네루다에게 보내기 위해 고향의 여러 가지 소리들을 녹음하는 인상적인 장면이 있다. 여기서 해변의 파도소리를 녹음하는 게 은유의 출발이라면 어부들이 그물을 걷어올리는 소리를 담고자 하는 모습은 은유의 확장이라고 할 수 있다. 거기에서 나아가 밤하늘의 별빛을 녹음하는 기막히게 아름다운 장면에 이르면 은유는 절정에 도달하게 된다. 더이상의 구차한 설명이 필요없게 되는 것이다.

‘일 포스티노’는 이탈리아어로 우체부라는 말이다. 우리 동네 비디오 가게의 <일 포스티노>는 수많은 사람들의 집을 방문한 나머지 화면 상태가 아주 불량하다. 까짓것, 이 기회에 우리 집에서 나 혼자만 만날 수 있는 <일 포스티노>를 하나 구입해 버려?

안도현/ 시인 <서울로 가는 전봉준> <그리운 여우> <외롭고 높고 쓸쓸한> <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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