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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장에 중립은 없다! <노 맨스 랜드>
2004-12-15
글 : 황진미 (영화칼럼니스트)

※스포일러 있습니다.

선우휘의 <단독 강화>(1959)라는 소설이 있다. 한국전쟁 때 국군 병사와 인민군 병사가 만나 형제애와 연민을 느끼며 동굴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이튿날 중공군에 맞서 같이 총 맞아 죽었다는 이야기이다. <공동경비구역 JSA> 역시 국군과 인민군이 개인적으로 만나 형제애를 나누다가 들통나서 파국을 맞는다는 이야기이다. 이들 이야기의 공통점은 적군이라 할지라도 개인적으로 만나면 형제애든 민족애든 인간애를 느끼고 정치적인 대립은 온데간데없어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양쪽 진영의 대치가 팽팽한 참호 속에서 세르비아 병사와 보스니아 민병대원이 만났다. 또 한명의 보스니아 민병대원은 초강력 지뢰를 깔고 누워 있다. 초동 작전에 조금 민첩했던 보스니아 병사가 세르비아 병사를 포로로 잡았지만, 둘의 관계는 불안정하며 수시로 역전된다. 이 둘은 여기서 어떻게 살아나갈 수 있을까?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그들이 일단 더이상 서로 총을 겨누지 말고, 제3의 진영에 도움을 요청하여 참호에서 ‘구조’되어 각자의 진영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 둘은 일단 말이 통하므로 협상이 가능하며, 마침 ‘유엔평화유지군’과 ‘언론’이라는 ‘제3의 진영’도 있으니 이들을 잘 활용하면 가능할 것 같기도 하다. 협상의 가능성과 제3의 진영의 역할에 대해 한번 곱씹어보자.

협상의 가능성: ‘단독강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불행히도 그들의 대화는 협상으로 치닫지 않는다. “나는 총이 있고 너는 없다. 누가 전쟁을 일으켰지?”가 두 사람 사이에서 교환되고, “널 죽이고 말 테야”로 귀결된다. 친구 때문에 발이 묶인 보스니아 병사는 혼자서 유엔군을 따라나서는 세르비아 병사에게 총을 쏜다. 그때는 대치상태도 아니었는데 왜? 세르비아 병사가 빠지면 세르비아 진영이 포격할 것을 두려워해서이다. 그뒤 세르비아 병사는 슬그머니 칼로 기습하고, 보스니아 병사는 상황이 다 끝나갈 시점에 기필코 총을 당기고 벌집이 된다. 이번엔 공격당할 것을 두려워해서도 아닌데 왜 굳이 그들은 서로 공격했을까? 이는 이성의 발로가 아니라 (악)감정의 발로이다.

위의 상황을 정리해보면, 그들이 ‘단독 강화’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첫째, ‘죄수의 딜레마’와 둘째, 악감정의 교환 때문이다. 전자는 지극한 이성이요, 후자는 지극한 감성이다. 예컨대 ‘죄수의 딜레마’란 이런 것이다. 두명의 죄수가 공범으로 심문받는데 둘 다 자백하지 않으면 3년형을, 한명만 자백하면 자백한 쪽은 1년형, 자백 안 한 쪽은 25년형을 받고, 둘 다 자백하면 10년형을 선고받는다면 어찌 될까? 죄수 입장에서 상대편이 자백한다고 가정하면, 자신은 자백하면 10년, 안 하면 25년형이므로 자백하는 것이 유리하고, 상대편이 자백하지 않는다고 가정해도 자신은 자백하면 1년형, 안 하면 3년형이 되기 때문에 역시 자백하는 편이 유리하다. 그래서 둘 다 자백하고, 10년형을 받는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둘 다 자백을 안 하고 3년형을 받는 것이 훨씬 유리했다. 그러나 둘은 반드시 자백하게 되며, 이는 서로 협상을 시키거나 친구 사이라 해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협상의 결과가 끝까지 지켜질지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상호 협력이 상호 배신보다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성적인 참가자는 반드시 배신을 선택한다는 것이 <뷰티풀 마인드>의 주인공 존 내시를 비롯한 수학자들의 결론이다. 각자의 이기적인 타산이 결국 전체의 이익도 낳을 것이라는 애덤 스미스의 ‘천진한’ 맹신이 ‘논리적으로’ 타파되었다. 따라서 전장에서 만난 두 사람이 ‘둘이 총질해봐야 유리할 것 없다’는 판단하에 평화 공존이나 무사귀환을 선택할 가능성은 수학적으로 제로이다.

여기에 감정이 보태진다. ‘내가 죽더라도 저놈을 꼭 죽이고 말 테다’는 증오심은 논리적으로 설명될 수 없다. 이 순연한 ‘이기심을 초월한 욕망’은 다만 경험에 의해 촉발되고 교류되고 공감될 뿐이다. 애초 세르비아 군인은 총알 넣는 법도 모른다는 신병이었다. 영화는 ‘신병’이라는 말 속에 기대되는 ‘순진한’ 이미지를 배반한다. 전장에서 만난 적군한테까지 통성명을 청하는 그이지만, 첫 시퀀스가 지나면서 그는 더이상(<서부전선 이상 없다> 같은 전쟁담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여 이른바 ‘휴머니즘’을 일깨우는) ‘벌벌 떠는 신병’이 아니다. 그는 급속도로 전쟁과 분노와 적개심에 익숙해져서, 비록 서툴망정 자기 깜냥만큼 비열하고 공격적이다. 그들은 매순간 나름대로 합리적이고 타당하게 움직인다. 악한이나 바보나 미치광이는 없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마지막 순간 기어이 총을 겨누고 죽는다.

제3의 진영: 제 몫 챙기기 바쁜 평화유지군과 언론

유고연방의 지원을 받는 세르비아군이 보스니아에서 인종청소를 자행해도 유엔군은 중립을 모토로 구호물자를 전달할 뿐 분쟁에 개입하지 않는다. 유엔평화유지군은 “현지인들간의 살상을 막되 병력을 쓰거나 위험한 일은 않는다”는 강령하에, (원래 있는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지는 몰라도) 없던 평화를 창출하지는 못한다. 그들은 분쟁에 최소한 개입하기 위해 한편에서 개입을 요청하면 다른 편에서 반대한다고 답하며, 오직 “일 하는 척” 시간을 벌며 “완벽하게 임무를 수행”한다.

그 와중에도 “지켜보는 데 신물이 난” 중사는 행동을 개시한다. 그는 상관의 승인을 얻기 위해 언론과 공조하여 상관을 압박하기도 하고, 세 병사의 구조에 최대한 힘쓰지만 결과는 참담하다. 둘은 눈앞에서 가장 우려했던 상황으로 죽고 하나는 손도 못 쓰고 버려야 했다. 상관을 보호하기 위해 언론을 따돌리던 대위는 결국 적당한 선에서 언론을 통솔하고 지뢰가 해체되었다며 언론과 중사를 속여 단념시킨다. 반면 복지부동과 호신주의로 일관하던 대령은 사건이 TV에 나오자 헬기를 타고 납신다. 그간의 미꾸라지 전법은 “능률적인 새 명령방식”이라 설명하고, 마지막에 빠져나가면서도 “한 생명이라도 더 구해야한다”는 미사여구를 잊지 않는다. 하기야 대위의 상급자가 모두 언론 세미나에 출석 중이라니, 능란한 ‘언론 플레이’가 장교 승급의 기준인가 보다. 거기에 양쪽에 참호 탈환 계획을 흘려 교전을 통한 증거인멸 작업까지 완벽하게 마무리한다. 과연 처신의 귀재이다.

언론은 병사들의 구조에 적극 관심을 기울인다. 그들은 여론을 무기로 장교를 압박할 수도 있지만, 언론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전쟁의 참상’이다. 그들은 카메라 앞에서 총격전이 벌어지자, “원하는 것을 얻”고 “정말 고마워”한다. 지뢰 위의 병사와 참호가 어찌 되었는지 마지막까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위험을 실감한데다가 찍을 거리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영화에는 “살육 앞에 중립은 없다. 막지 않으면 이미 편드는 것”이란 의미심장한 말을 반복하지만 이는 비단 ‘살육’에만 국한된 말이 아니다. 중립이란 애초에 없으며, 각자의 입장이 있을 뿐이다. 각자의 입장에서 각자의 편을 든다. 유엔은 유엔의 편이요, 언론은 언론의 편이다. 이따금 합종연횡하기도 하나 마지막엔 따로 간다. 영화는 이 모든 ‘당파적’ 과정을 신랄하게 묘파한다. 지뢰 위의 사람은 혼자 남겨진다. 단독강화나 중립은 없다.

추신.94년 홍콩인에게 “홍콩이 반환되면 어찌 될지 고민 많겠다” 답변 “언제 핵폭탄이 떨어질지 모르는 서울에 비하겠냐?” 르완다 사태를 걱정하는 보스니아 병사가 남 같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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