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영화평론가 서동진이 <발레교습소>를 지지하는 이유
2004-12-22
글 : 서동진 (영화평론가)
못난체 하는 영화의 윤리적 용기, <발레교습소>

이 좋은 “탈훈육시대”의 청춘들에게, 구질구질한 현실을, 그것도 두 시간 가까이 장황하게 늘어놓는 것은 환영받을 짓이 아니다. 변영주 감독의 두 번째 작품인 <발레교습소>는 딱 그 짓을 한다. 이 영화에는 민재와 수진 그리고 ‘기타 등등’이라고 해야 옳을 많은 인물들이 장황하게 등장한다. 그리고 거의 모든 인물들이 에누리 없이 제 이야기를 뱉고 나서야 화면에서 사라진다. 우리 시대의 “훌륭한” 영화란 것의 상투적인 모습은 이런 게 아닐까. 폐소공포증에 걸린 듯한 인물이 한두명 등장해 내면이라는 디제시스적인 환영을 만들어내고, 그 안에서 금욕적일 만큼 침묵하는 뻘 짓의 영화. 그에 견준다면 <발레교습소>는 차라리 상스러운 영화이다. 부르디외 식으로 말하자면 추상사진을 좋아하는 프티부르주아한테 잔칫집 사진은 너무 사실적이어서 하층계급의 취향에 어울리는 것이듯이, <발레교습소>는 하층계급 취향의 영화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디 취향의 문제이겠는가.

한마디로 이 영화는 시대착오적이고 너무 “구리다”. 더욱이 이 영화는 역설적으로 보수적이다. 이는 지식정보자본주의의 시대에 더이상 노동자는 없다고 젠체하는 거듭난 ‘제3의 길’ 좌파들 앞에 작업복 차림으로 나타나, 촌스럽게(!) 고용안정과 복지보장을 외치는 육체노동자의 보수성과 같다. 그리고 우리 시대의 보수성이 아마 그런 것이라면 나는 그쪽에 속한다. 그리고 그런 고루한 주관적인 정치적 취향으로 역시 나는 <발레교습소>를 사랑한다. 우리 시대의 청춘을 압축하는 것은 차라리 “20살의 자유, TTL”이라고 해야 옳다. 아니 이마저 지금엔 별 실효가 없을 것이다. 요즘 어느 청춘이 자신을 세대의 정체성과 더불어 생각할 것인가. 여전히 스무살 언저리의 나이를 사는 청춘들이 있지만 그들은 더이상 훈육사회의 학생이란 정체성에 매달려 있지 않다(고 믿는다). 교육인적자원부 버전으로 말하자면 “자기주도적인 학습에 힘쓰는 자율과 책임의 나”가 있을 뿐이다. 이런 때에 지나간 가부장적-관료적-훈육 자본주의 시대의 악몽을 연상시키는 가족, 학교, 입시, 가난을 들먹이다니! 그리고 더욱이 그 자리에서 가장 멀리 도망친 청소년들을 불러앉히다니! <발레교습소>는 그런 핀잔을 들어도 할말이 없다.

<발레교습소>는 “지금 여기에서 산다”는 것의 꼬락서니에 관하여, 처량하다 싶을 만큼, 중언부언 그리고 아주 시시하게 늘어놓는다. <엘리펀트> 식의 지독한 우아함도 없고, <트레인스포팅>류의 신랄한 스타일도 없다. <고양이를 부탁해> 식의 달콤쌉싸름한 페이소스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 영화가 영화 스스로에 복종하려는 욕망을 거부한다는 것, 그리고 자신이 재현하는 대상에 충실하려는 윤리적인 몸짓을 고집하고 있음을 인정해주어야 옳다. “좋은 영화”로 불리는 것들이 가장 따분하고 상투적인 작위만을 반복하며 예술이든 영화이든 둘 다를 파산시키고 있는 지금, 나는 차라리 <발레교습소> 같은 영화야말로 영화에 충실하려는 역설적인 몸짓을 밀고 간다고 확신한다. 자신이 재현하려는 대상에 관한 윤리적인 헌신을 고집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영화가 잃어버린 것이 아닐까.

<발레교습소>는 로맨스와 우정 그리고 가족의 사랑이라는 이야기를 통과하면서 쾌락을 던져주지만, 군데군데 거북한 장면들로 얼룩져 있다. 이를테면 민재와 수진이 마침내 사랑을 나눌 때의 장면은 적잖이 불안하고 불편하다. <지구를 지켜라!>를 함께 보다 그 짓을 하려는 둘의 서툰 몸짓은 낭만적이기는커녕 조금 기이하다. 퉁명스럽게 둘의 몸을 잡는 화면도 그렇지만 계속하여 들려오는 성가신 소음(민재의 성마른 호흡, 소파가죽의 적나라한 마찰음 등) 때문에 도무지 거슬리기만 하다. 클라이맥스의 열정을 끌어올려야 할 구민회관에서의 발레공연은 놀랄 만큼 초라하고 심심하며 나아가 황당하기까지 하다. 이야기는 우리를 박진감으로 죄어오는데 정작 눈에 보이는 것은 우리를 배반한다. 아무런 수사학적인 스타일도 고려함 없이, 시야의 길이와 깊이만을 의식한 평범한 숏들이 교대하여 등장한다. 아마 관객은 실망감을 넘어 내심 분노할 수도 있다. “에이, 영화를 왜 이 따위로 못 만드는 거야.”

그러나 나는 이 대목에 가서야 감독이 거의 통제불능의 상태로 영화를 막 만들었다는 인상을 접었다. 아니 나아가 <발레교습소>는 어떤 숨겨진 논리적인 공정을 거치며 만들어진 영화일 것이라는 망상까지 품게 되었다. 예를 들어 대중영화의 상투적인 플롯이란 것은 모두 수집하여 연결한다. 그리고 그것에서 자동연상될 수 있는 아름답고 쾌적한 모든 시각적인 풍경을 지우고 다른 것, 즉 현실의 것으로 대체한다. 아마 이는 나의 착각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잘난 체하는 영화들 사이에서 “못난 체”하는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윤리적인 용기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감독은 그걸 그냥 자신의 주관적인 진정성에의 집착 탓이라고 주눅 든 채 말한다. 그러나 그건 너무 겸손한 짓이다. 당신은 한국의 영화 자체를 위해 아주 좋은 짓을 했다. <발레교습소>는 못 만들려 애쓰는 안타까운 몸짓으로 좋은 영화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영화에서 윤리를 구제하려는 보기 드문 몸짓을 실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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