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귀여워> 속에 드러난 가부장제를 비판한다
2004-12-22
글 : 남다은 (영화평론가)

한명의 여자와 네명의 남자가 한 이야기에 북적댈 때 이들의 관계에서는 세 가지 상상이 가능하다. 어머니와 아들들, 혹은 한 여자(창녀)를 욕망하는 네 남자, 혹은 네 남자(일처다부제)를 욕망하는 한 여자. 그런데 사실 이러한 구분은 무의미하다. 어느 편이 도덕적인지, 또 어느 편이 전복적인지의 가치판단도 무의미하다. 왜냐하면 이 세 가지 상상은 어차피 하나의 이야기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가부장제! 가부장제의 구조 안에서 성스러운 어머니, 창녀, 남자를 욕망하는 발칙한 여자가 각기 다른 위치를 점한다고 믿는 건 순진한 착각이다. <귀여워>의 미덕은(미덕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영화가 이 세 가지 구분의 무의미함을 알고 그 전제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는 데 있다. 평단이 그토록 열광하는 이 영화의 카니발리즘, 그 축제의 미학은 분산되는 축제의 에너지를 가장하여 하나의 또렷하고 공고한 구조를 드러내는 속임수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이 영화의 중심은 바흐친도, 프로이트도 아니다. 그 중심은 지금 우리가 사는 견고한 가부장적 현실이다.

순이는 길 위의 여자다. 수많은 영화·문학담론 속에서 길 위의 여자는 거리의 여자, 즉 ‘창녀’로 읽혀왔다. “아버지, 여자 하나 주워올까.” 이 뻔뻔한 아들의 언어, 혹은 그들 욕망의 전시가 허락되는 건 그녀가 도로 위의 여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집없는 여자가 그들의 ‘집’으로 들어서는 순간 그녀는 표면적으로 몇 가지 역할을 더 부여받는다. 아내와 어머니, 그리고 성적 존재. 남자들은 온갖 논리를 동원하여 그녀를 이처럼 다양한 이미지로 전유하지만 그녀가 그들 사이에서 교환되는 방식은 단 하나이다. 풍만한 자연의 몸. 순이는 이 모든 이미지가 되어 기꺼이 그들 욕망의 대상이 되어준다. 그러나 이것은 그녀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 즉 무성(無性)적 존재이므로 가능하다. 그 풍만한 육체 속에는 성(性)이 없다. 순이는 그들이 창조한 껍데기만 남은 인공적 여성의 이미지, 그 판타지이다. 판타지로서의 그녀는 어머니와 성애적 대상 사이를 오가며 과잉된 이미지를 창출하지만 존재의 과잉은 언제나 ‘비존재’와 양면을 공유한다는 사실.

황량한 벌판 위에 위태롭게 서 있는 남자들의 집은 사이비 냄새가 물씬 나는 그들만의 ‘신전’이다. 막걸리와 샹송이 어우러지는 이 무국적적 신전에서 아버지와 아들들은 튼튼한 지붕과 울타리 없이도 유대를 맺는다. 영화의 속임수는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그들의 유대는 기존의 가족서사가 보여주는 통합, 조화와 거리가 멀다. 그들은 흩어짐으로써 혹은 해체함으로써 관계를 유지하며 표면적으로는 일탈적인 서사를 구축해간다. 순이를 중심으로 아버지와 아들은 금기를 부수고 권위에 도전한다. 한 여자를 공유하며, 하나의 판타지를 나누며 그들의 축제는 에너지를 뿜어댄다. 허름하지만 생명력 넘치는 그들만의 신전에서 순이는 하얀 양으로, 붉은 피로 생글생글 웃으며 자신의 몸을 내준다. 그 웃음과 그 피를 딛고 아버지와 아들들은 질서가 깨진 자리에서 해방을 만끽한다. 아버지는 더러운 과거를 묻고 마침내 신이 되고 아들들은 인생의 모퉁이를 넘어선다. 순이는 하얀 드레스를 입고 옥상 위에서 불꽃을 터뜨리며 남자들의 이 위대한 축제를 홀로 마무리한다. 그리고 말없이 신전을 떠난다. 아버지와 아들처럼 축제의 주체가 아니라 축제의 시공간 그 자체로 존재하는 순이는 정확히 말하자면 그 축제에서 배제된 것이다.

“아무도 내 과거를 묻지 않아서 좋아.” 순이는 이렇게 말하지만 사실, 남자들에게 그녀의 과거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묻지 않는 이 쿨한 집시 여인은 머리로만 욕망하는 남자들에게 안성맞춤인 판타지, 부담없는 캐릭터이다. 혹자는 순이의 “까르르” 웃음소리가 남자들의 욕망을 비웃는다 말했지만, 그것은 사실, 남자들의 어리석음을 포근히 감싸주는, 그들의 폭력성을 무화시켜주는 그들 욕망의 산물이다. 축제를 통해 그들의 욕망을, 금기를 해방시켜주는 순간, 역설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가부장제의 은밀한 작동구조이다. 권위없는 아버지와 덜떨어진 아들들의 등장, 그리고 그들이 벌이는 축제의 미학이 가부장제의 그 일방적인 구조에 대한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귀여워>는 결코 귀여울 수 없는 그들의 욕망을 귀엽게 포장하는 재주를 부렸다. 그러나 영화가 환상적인 축제의 불꽃들을 흩날리며 현실을 지우려고 애쓸수록 지금, 여기의 폭력성은 더욱 교묘한 자태로 고개를 들고 있다.

추신. 이 영화의 홍보 이벤트가 “순이 가슴 만지기 게임”이었다는 사실, 그 문구가 “한번 원없이 만져보자”였다는 사실은 한순간의 선정적 논란으로 지워졌다. 그러나 아무리 영화와 홍보가 별개라 해도 나는 이 이벤트의 용감한(?) 발상이 카니발리즘의 미학을 걷어낸 이 영화의 알맹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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