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배우들이 ‘망가진다’ 는 표현은 너무 흔해 식상하다. 연기가 안 따라줘도 분장 좀 덜하고, 예쁜 척을 살짝 포기하면 관객은 너그러워진다. “망가지느라 고생했네.” 그러나 <신석기 블루스>의 이성재(33)를 보고 나면 ‘망가진다’는 영화적 표현에 대해 ‘심사숙고’(?)해보게 된다. 걷잡을 수 없는 외모에 엉거주춤한 자세, 50년대 읍내 이장님 복장의 신석기는 틈나면 코를 후비고 자신도 모르게 무좀난 발을 파리처럼 긁어댄다. 악랄한 살인자를 연기해도(<공공의 적>), 조폭(<신라의 달밤>)을 연기해도 좀처럼 흐트러지지 않고 이지적 풍모를 풍기던 그에게 이보다 더한 변신이 있을까.
외출 끊고 ‘추남은 괴로워’ 실감
“시나리오를 처음 봤을 때 그 정도까지 갈 줄은 몰랐어요. 그런데 그 정도로 막 가니까 도리어 끌리대요. 촬영 현장에서 모니터를 볼 때는 몰랐는데 시사회때 큰 화면으로 보니까 좀 징그럽더라구요.” 뻐드렁니야 촬영때만 끼지만 뽀글뽀글 머리와 밀어버린 눈썹은 어쩔 수 없어 촬영 중에는 사적인 외출을 피했다니, 일상생활에서도 ‘추남은 괴로워’의 체험을 모질게 한 셈이다.
<신석기 블루스>는 동명이인에 관한 이야기다. 잘생기고 유능하며 냉혹한 변호사 신석기A와 못생기고 무능하며 인정만 많아서 동네 노인들의 억울한 사정만 공짜로 해결해주는 변호사 신석기B가 우연한 사고로 몸이 바뀐다. 외모야 꾸미면 그만이지만 전혀 다른 두 성격이 섞여 있는 신석기 캐릭터는 술술 흘러가는 영화처럼 단순하지 않다. 머릿속은 분노와 야심으로 끓어오르는데 고작 다방에서 구질구질한 깽판이나 치고 경찰에게 비굴하게 애원하는 자신을 지켜봐야 하다니 거의 정신분열증에 이를 지경이다.
쉽지는 않았지만 마음은 편했죠
그는 “쉽지는 않았지만 가장 마음 편했던 작업”으로 <신석기 블루스>를 자리매긴다. 그는 이 영화에서 처음으로 다듬어지지 않은 생소리를 낸다. 단순히 캐릭터를 위해서는 아니다. “지금까지는 항상 책상 앞에 앉아서 페이퍼 작성하는 식으로 준비를 해왔어요. 시나리오를 보고 내가 설정한 윤리나 당위성에 나를 끼워 맞추는 식이었죠. 반면 <신석기 블루스>는 상황에 나를 던지고 마음가는 대로 하려고 했지요. 그러니까 미처 생각지도 못한 아이디어들이 촬영현장에서 ‘발견’되더라구요. 물론 열개 중에 여덟개는 짤렸지만.(웃음)” 지금까지 감정의 3분의 2를 덜어내는 절제의 연기를 해오면서 극 중 구심력으로 작용해온 그는 이 영화에서 원심력으로 내지른다. 생전 안하던 ‘오버’걱정을 하면서 연기했던 신석기는 그를 자유롭게 했다.
10번째 작품, 이제 바이엘 뗀 기분
<신석기 블루스>로 이제 작품목록의 10개를 채운 그는 “피아노 레슨으로 비유한다면 이제 막 바이엘을 뗀 기분”이라고 한다. “지금도 카메라 앞에 서면 호랑이와 정면응시하는 것처럼 두렵고 떨려요. 평생 그럴거예요. 다만 한작품 한작품 늘려갈수록 긴장감과 자신감의 비율이 조금씩 변하는 정도지요. 그나마 이만큼 자신감이 쌓여서 <신석기 블루스>에서는 편안하게 지를 수 있었던 거구요.” 자신의 어깨에 있던 짐을 내려놓으니 새삼 감독의 중요성이 무거워진단다. “전에는 내가 도와줘야 한다는 중압감에 시달렸는데 이제는 감독에게 편하게 의지하고 싶어요. 다른 배우들하고는 반대로 가는 셈인가요? 뭐 어때요” 11번째 작품을 새로운 데뷔작으로, 21번째 작품을 또 새로운 데뷔작으로 만들고 싶다는 이성재는 앞으로도 “덜 이성재스러운 캐릭터”로 걸음을 옮겨갈 생각이다. 목 위까지 여몄던 단추를 풀고 꼭 조였던 넥타이도 헐겁고 삐딱하게 매기 시작한 모범생의 다음 액션이 어떨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