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리포트]
[현지보고] 현대인의 사랑에 관한 보고서, <클로저>
2004-12-29
글 : 박은영

LA에서 미리 만난 주드 로·줄리아 로버츠 주연의 <클로저>

“사랑은…”이라고 시작하는 고금의 시구들과 유행가 가락을 헤아리다보면 손가락이 먼저 지친다. 보고 또 봐왔건만, 지금까지도 TV와 스크린은 각종 버전의 사랑 이야기로 넘쳐난다. 아니, 딱히 사랑 이야기가 주제가 아닌 영화라도 사랑은 꼭 양념으로 들어간다. 사랑은, 선남선녀 누구나 한마디씩 이야기할 거리가 있으면서도 누구의 말도 정답은 아니다, 라는 말조차 상투적이다. 정말이지 이야깃거리가 아직도 남았나 싶은데, ‘그렇다!’는 영화가 다가왔다. 마이크 니콜스 감독의 신작 <클로저>. 제목에서부터, 사랑의 진실에 관해 가까이 가보겠다는 야무진 의도가 엿보인다. 12월 첫주 개봉 당시, 스크린 당 최고의 흥행수익을 올리며 선전하고 있는 <클로저>를 LA에서 미리 만났다. 주변의 사랑 이야기가 그렇듯, 굽이굽이 사연은 복잡해도 간추리면 골격은 딱 이거다.

장소는, 현대 런던(뉴욕이나 파리, 서울이라도 별반 다를 것 같지 않다), 여기 네명의 남녀가 있다. 사랑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한다. 사랑한다면 나를 용서하라는 유능한 사진작가 애나(줄리아 로버츠), 도대체 만질 수도 볼 수도 없는 사랑이라는 게 뭔지, 달콤한 말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는 당돌한 미국 처녀 앨리스(내털리 포트먼). 사랑이 뭐 그렇게 대단한 거라고, 필요하다면 거짓말도 하라는 가난한 소설 작가 댄(주드 로), 타협이 뭔지 모르는 당신은 사랑에 관해선 아무것도 모른다는 현실주의자 피부과 의사 래리(클라이브 오언).

브로드웨이 연극을 <졸업>의 마이크 니콜스가 영화화

짐작하듯이, 이 네명의 선남선녀가 얽히고 설켜 사랑하고, 미워하고, 배신하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고… 하는 게 사건이라면 사건이다. 사랑의 4중주이되 불협화음이다. 그런데, <클로저>가 해부도를 들이대는 것은 이 고전적인 내러티브 사이사이의 ‘쉼표’다. 여기에는 ‘왜?’라는 순진한 호기심보다는 ‘어떻게?’라는 잔인한 관찰의 욕망이 숨어 있다. 네명의 주인공은 ‘우리’를 대변하는 일종의 표본 집단이다. 우리는 위와 같은 상황에 ‘어떻게’ 맞닥뜨리고, ‘어떻게’ 반응하나. 일단 <클로저>를 ‘현대 도시 남녀의 사랑의 행태에 관한 보고서’라고 하자.

제법 무거운 숙제를 안아든 <클로저>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오랜만에 보는 정통 성인물이다. 달콤한 솜사탕 같은 사랑의 동화가 아니라, 배신과 상처와 질투와 후회 같은 독기 센 감정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보여지는 것’보다 ‘말해지는 것’이 더 섹시하다는 평처럼 상당한 수위의 대사들로 가득 차 있다는 점에서. 네명의 주인공에게서 ‘우리’를 읽어내는 것은 전적으로 관객 자신의 몫이라는 점에서.

여기까지 이야기하고 보면, <클로저>가 달콤한 솜사탕을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할리우드표가 아니라는 점을 눈치챘으리라. 이른바 말 많은 정통 브로드웨이 연극 출신이다. 패트릭 마버가 원작을 쓴 <클로저>는 1997년 런던에서 초연한 이래, 뉴욕의 브로드웨이 등 전세계 100여개 도시에서 상연된 경력이 녹록잖은 경력의 연극이었다. 초연 당시, 런던비평가협회상과 뉴욕비평가협회 최우수 외국연극상 등을 휩쓸었다. 무대 위의 연극을 ‘망원경 관점’에서 스크린에 옮긴 것은 <졸업>과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의 감독 마이크 니콜스. 7살에 뉴욕으로 이민 와서 브로드웨이와 영화계를 넘나들며 40년간 작업해온 마이크 니콜스 감독은 이른바 ‘뉴욕 예술계’적 감성을 대변해왔다. 일관되게 탄탄한 시나리오와 대사에 기반한 문학성이 강한 작품들, 날선 대사와 도망칠 수 없는 상황들, 도덕적으로 비난할 수도 공감할 수도 없는 실존적 상황 속의 인간들이 그의 세계를 요약할 수 있는 말들이다. 지난해 골든글로브상과 에미상 등 미국 방송계를 휩쓴 화제의 HBO TV영화 <엔젤스 인 아메리카>도 그의 작품. 런던에서 태어나 뉴욕에 정착한 <클로저>는 정확히 이 계보 위에 서 있다.

비평가들 클라이브 오언 연기 극찬

<엔젤스 인 아메리카>에서 알 파치노, 메릴 스트립, 에마 톰슨 등 정통 연기파 배우들의 진면모를 소름시끼게 끌어냈던 니콜스 감독이 <클로저>에서 우리의 표본으로 택한 배우들은 선배 배우들 못지않게 이름만으로 쟁쟁한 주드 로, 줄리아 로버츠, 내털리 포트먼, 클라이브 오언, 두명의 영국 남성과 두명의 미국 여성이다. 이 스타들이 매력과 한계를 모두 가진 캐릭터를 각자의 방식으로 어떻게 살려내고 있는가가 영화의 볼거리. 처음부터 끝까지 변하지 않는, 가위로 오려진 종이인형 같은 캐릭터가 아니라, ‘관계’ 속에서 변화하는 캐릭터를 그려야 한다는 점이 이들에게는 부담이었다고. 최근 한꺼번에 쏟아져나온 작품들 때문에 이미지가 너무 흔해져버린 감이 없잖아 있는 주드 로는 <알피>에 이어, 매력적인 유혹남의 댄 역할을 맡았다. 매력남이기엔, 꿈만 간직한 신문 부고 담당작가라는 현실이 초라하다. “웃지 않는 것”이 치명적인 단점이라는 <뉴욕타임스>의 평에도 불구하고, 오랜만에 줄리아 로버츠는 이혼경력 있는 유능한 사진작가라는 쿨한 듯하나 한편 무력한 캐릭터 안나를 맡아 열연한다. 귀여운 여인 줄리아 로버츠가 아니라 연륜이 쌓인 성숙한 여인 줄리아 로버츠를 볼 수 있는 기회다. 안나를 사이에 두고 댄과 한판 승부를 벌이는, 어떻게 보면 뻔뻔하고 속물스런, 그러나 가장 현실적이기도 한 의사 래리 역은 클라이브 오언. 런던에서 연극이 초연됐을 때, 댄 역을 맡았던 오언은 영화 제의가 들어왔을 때, 래리 역을 하게 해달라고 했다는데. 적을 알면 적을 이긴다? 댄과 안나, 래리와 안나, 댄과 래리 사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클로저>에 대해 찬반양론을 펼친 비평가들도 클라이브 오언의 연기력만큼은 만장일치로 극찬이다. 아닌 게 아니라, 오언의 캐릭터는 주위 세 사람과의 관계에 긴장을 불어넣는 강한 파워를 지녔다. 오언이 유일하게 굴복하는 사람은 앨리스. 내털리 포트먼은 종잡을 수 없는 스트립걸, 앨리스 역으로 완전히 성인연기자로 재탄생했다는 평을 듣고 있다. 아무래도 화제의 중심이었던 스트립쇼 장면을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앨리스의 진면모를 보여주는 신이자, 욕망의 ‘시선’이 지닌 파워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신이기도 하다. 스트립쇼를 하는 앨리스의 벗은 몸을 훓는 래리의 시선과 그 시선을 농락하는 앨리스의 시선이 얽히는 고밀도의 이 장면을 보고 있노라면, ‘시선을 정복하는 자’가 진정한 승자라는 말이 떠오른다. 앨리스. 시선의 정복자.

내털리 포트먼, 성인연기자로 재탄생

대체로 ‘연극적’인 <클로저>가 영화적인 매력을 보여주는 부분도 바로 이 ‘시선’에 대한 영화적 표현이다. 영화 내내 캐릭터들이 얼마나 서로를 ‘엿보는’지 한번, 관찰해보라. 영화의 시작장면, 설명하자면, “댄과 앨리스가 길에서 첫눈에 반했다”라고 요약될 수 있는 그 순간의 느낌은 카메라가 아니면 잡아내지 못하는 것이다. 누군가가 나(관객)를 정면으로 쳐다보며 서서히 걸어오고 있다. 슬로모션과 발걸음 속도에 맞춘 듯 내리깔리는 음악, 심장박동이 서서히 빨라지다 딱 눈이 맞고야 만다. “댄과 안나가 사진을 찍다 사랑에 빠졌다” 신의 두 사람, 안나는 아예 사진사다. 안나의 카메라 앞에 포즈를 취한 댄.

이 네 사람의 엎치락뒤치락 변화무쌍한 사랑의 꼬임을 보고 있노라면, 흡사 홍상수 영화의 주인공들이 생각난다. 상황 속에 놓인, 설명할 수 없는 행위들을 하고야 마는 주인공들. 유혹남인 듯하던 댄이 사랑의 패배자로, 마냥 신사 같던 래리가 비열한 남편으로 변해가는 과정에서 댄이 래리인 듯, 래리가 댄인 듯 서로를 닮아간다. 결국 댄이 래리이고 래리가 댄이 아닌가. 네명의 캐릭터들은 결국 사랑에 빠진 인간이 보여주는 속성을 4분할 해놓은 것에 지나지 않으니까.

정작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시간순으로 보여주기보다, 뭉텅뭉텅 잘린 그 사건의 전조와 사후에 우리의 캐릭터들이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이어붙인 듯한 <클로저>는 확실히 연극적이다. 그 틈을 상상하는 것은 관객의 몫이고, 그 상상의 폭만큼 캐릭터들의 ‘말’도 독해폭이 넒어진다. 권선징악의 결말을 바라는 관객에겐 감독이 의도한 ‘불확실성의 미덕’은 혼란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따져보면, 적어도 <클로저>의 세계에선 누가 선하고 악한지 판단할 수 있는 소실점의 시선이 주어져 있지 않다. 종국에는, 누가 거짓말을 하고 진실을 말하는 것일까. 사랑에 관한 한 진실은 뭐고 거짓말은 뭘까라는 질문이 머리 속을 헤맨다. 그러나 절대적으로 옳은 답이 없을 것임을 상정하고 시작한 이 보고서는 결국 ‘어떤’ 시점에 ‘어떻게’ 진실과 거짓을 말할지 아는 자가 사랑의 게임에서 승자가 되는 길이다라는 소결론을 제시하는 듯하다. 사랑의 진정한 승자는 또 무슨 의미인가라는 질문에 <클로저>는 물론, 대답하지 않는다.

영화의 말미에, 영화의 시작처럼, 단발머리를 찰랑거리며 한 걸음 한 걸음 정면을 응시하며, 관객을 향해 다가오는 앨리스가 해답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앞과 뒤가 뫼비우스의 띠처럼 맞물린, 영원히 굴러갈 사랑의 방정식인가보다.

<클로저>의 배우, 내털리 포트먼·주드 로·클라이브 오언 인터뷰

“관계의 틈에 주목하라”

(위에서부터)내털리 포트먼, 클라이브 오언, 주드 로

-마이크 니콜스 감독과 쟁쟁한 배우들과 작업하는 경험은 어땠나.=내털리 포트먼 l 니콜스 감독은 지금까지 내가 만난 사람들 중 가장 똑똑하고 유머있는 사람이었다. 내가 실수해도 잡아줄 거라는 믿음이 있으니까 마음이 놓이는 감독이었다. 배우들도 다 프로라 내가 이것저것 새로운 시도를 해도 실패할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게 좋았다. (상당히 도전적인 역할이었는데) 도전적인 역할을 맡아보는 건 흥미로운 일이다. 배우로서는 나 자신의 가능성을 확대했다고 해야 하나. 개인적으로는 캐릭터를 도덕적으로 평가하기보다는 공감하는 경험을 했다. 거리를 두고 ‘인간’이라는 종을 관찰할 수 있었다고 해야 하나.=클라이브 오언 l 앙상블 연기가 주였으니까 2주 정도 굉장히 집중적으로 작업했다.=주드 로 l 신 단위로 끊어지는 영화 작업을 할 때 항상 고조된 감정를 유지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이번 영화의 경우에는, 대부분의 신들이 긴 편이고 워낙에 각본이 치밀하게 잘 쓰여져 있어서 감정을 자연스럽고, 미묘하게 발전시킬 수 있었다.

-당신에겐 매우 바쁜 한해였겠다. 6편의 영화가 동시에 나왔는데.

=주드 로 l 매우! 바빴다. (웃음) 순전히 개봉일정의 문제인데, 2년간의 작업이 2개월 안에 모두 쏟아져나오는 건 솔직히 별로 이상적인 일은 아니었다. 한 작품마다 다 애정이 가는 작품이고 흥미로운 작업이었지만, 내 이미지가 너무 흘러넘쳤던 감은 있다. 그러나 또 새로운 작품을 시작했다. 이제는 정말 ‘말’(홍보작업을 의미하는)로 말고 ‘연기’하는 일을 하고 싶다.

-남자 입장에서 마지막에 안나가 남편한데 돌아가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주드 로 l 글쎄, 아마 두 캐릭터가 ‘행복’이라든가 지속적인 관계를 갖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정말 해석은 관객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남자로서의 내 관점이 특별히 의미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캐릭터들이 성별에 따라서라기보다는 꼬이고 꼬인 ‘상호관계’에서 그 성격을 드러내니까.

-이 영화가 끊임없이 섹스에 관한 대화로 채워져 있는 게 흥미롭다.

=주드 로 l 나도 이 영화가 캐릭터와 대화 중심이라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직접적으로 섹스신을 보여주거나 하기보다는 비물질적인 대화와 감정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생각할 여지를 준다.=내털리 포트먼 l 영화에 ‘부재’하는 부분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클로저’라는 타이틀 자체가 아이러니한테, 일단 영화에서 보여지는 것과 보여지지 않는 것 사이에 틈이 있다. 그리고 캐릭터들이 그렇게 추구하지만 결국은 잡히지 않는 관계의 친밀감, 즉 캐릭터 사이의 결핍, 관계의 틈도 있다. 이 부재가 관객에게 긴장을 불러온다고 생각한다. 이 점이, 같은 것을 본 관객이 각자 독특한 경험과 해석을 하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영화에서, 특히 당신 캐릭터의 경우에 ‘퍼포먼스’가 중요한 화두라고 보이는데.

=내털리 포트먼 l 자신의 이미지를 퍼포먼스한다는 측면도 있었고, 스트립팅의 경우 그 장면을 찍으면서, 스트립팅과 일반적인 연기의 차이점이 뭘까를 생각했다. 결국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두 영국 남자가 주인공인데, 이 영화를 ‘영국 남성의 로맨스에 대한 보고서’라고 불러도 되겠나.

=주드 로 l 영국에서 시작한 연극이기는 하지만, 전세계적으로 공감을 얻었다는 점에서 딱히 영국 남자에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현대인들이 공유하는 보편적인 관계의 어떤 순간들을 예리하게 포착했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두 남자 캐릭터 중 누구에 가깝나.

=클라이브 오언 l 내 생각에 두 캐릭터는 모든 남자가 가지고 있는 측면을 공유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래리에 더 가깝다고 생각하는데 결국 누구랑 동감하는가는 각자의 경험에 따라 달라진다고 생각한다.

LA=옥혜령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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