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도산>에서 ‘리키도잔’을 그림자처럼 따르는 비서 ‘요시마치’ 역으로 출연한 일본 배우 하기와라 마사토는 국내 관객에겐 생소한 얼굴이다. 그를 소개하는 가장 친절한 이력이 일본에 방영된 <겨울연가>에서 배용준의 목소리 더빙을 맡았다는 사실일 정도로. 게다가 이렇게 단정히 슈트를 입고, 머리를 가지런히 빗어올린 모습이라면 구로사와 기요시의 <큐어>나 최양일의 <막스의 산>, <카오스> <고> <음양사> 같은 영화를 보았던 관객이라고 해도 익숙하지 않을 것이다.
1971년 생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소년 같은 눈매를 간직하고 있는 하기와라 마사토는, 그간 연기해왔던 다소 어둡고, 분열적인 캐릭터들에 비하면 훨씬 밝고 다정다감한 남자였다. 그러나 미소짓는 입끝에 여전히 드리워진 그늘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그의 성장기는 그리 밝지만은 않았다. 부모님과 떨어져 살아야 했던 상황에서, 예민한 사춘기 소년의 마음은 세상과 자꾸 엇박자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결국 보다 못한 어머니가 제안한 것이 ‘미국 여행’이었다. “그냥 집에 있는 것보다는 낫겠지” 하는 마음에 떠난 여행. 그러나 LA부터 뉴욕으로 이어졌던 이 여정에서 그가 맛본 것은 비단 햄버거와 프렌치프라이만이 아니었다. 바로 일본인들과 달리 열광적으로 영화에 몰입하는 미국 관객의 모습이었다. “<에이리언2>를 보러 갔는데 그건 거의 아수라장이었다. 컬처 쇼크 같은 걸 느낄 정도로. 누군가에게 저런 반응을 이끌어내는 직업이라, 저거 한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어머니에게 ‘배우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뭔가를 해보고 싶다고 말한 것이 내 인생에서 처음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15살에 출연한 드라마 <위험한 형사>를 시작으로 일단 시동이 걸린 배우생활은 브레이크 없이 성공적으로 뻗어나갔다. 영화와 드라마를 쉴새없이 오가는 청춘스타로, CF스타로 십여년간 바쁘게 내달리던 어느 날, 그러나 그에게도 슬럼프가 찾아들었다. “3∼4년 전 개인적으로 힘든 일을 겪으면서 정신적으로도 많이 피폐해졌다. 언론에 치이고, 유명인이란 것이 싫었던 순간이었다. 뭘 해도 재미없는 그런 시기였지만 일을 멈출 수는 없었다. 오로지 돈벌이로 드라마를 찍는 ‘직업배우’가 되어가고 있구나, 하고 느낄 정도였다. 그때 ‘아이돌 스타’ 하기와라는 이제 끝났다는 걸 알았다. 배우를 포기할 생각까지 했었다. 하지만 그 슬럼프 끝에 내린 결론이, 이제 30대 ‘신인배우’ 하기와라로 살겠다는 것이었다.”
그런 결심의 연장선상에 있는 <역도산> 역시 “새로운 도전이자 새로운 과제”였다. “잘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설경구란 배우와의 만남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는 경험이었던 것 같다. 글쎄, 이번 작품으로 무엇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는 다음 작품의 대본을 받아드는 순간 확실히 느낄 수 있겠지.” 연극도 영화도 조급하지 않게 한두편씩 이어나갈 거라는 그의 스케줄에는 이미 미이케 다카시와의 연극 한편이 잡혀 있다. “여전히 왜 내가 배우로 살려고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인생을 살면서 찾아나가야 할 테마다. 그저 죽을 때 내가 배우하길 참 잘했구나, 생각할 수 있다면 행복한 삶이 아니었을까.” 우리는 어쩌면 하기와라 마사토라는 ‘아이돌 스타’의 폼나는 1라운드를 놓친 관객이다. 하지만 ‘신인배우’ 하기와라 마사토. 이 30대 배우의 소박하지만 열의에 찬 2라운드는 훨씬 더 지켜볼 만한 게임처럼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