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뉴스]
[정이현의 해석남녀] <역도산> 의 ‘역도산’
2004-12-31
글 : 정이현 (소설가)

고독하지 않은 인간이 없건만 왜 혼자 고독한거야?

문맹이라는 비밀을 숨기기 위해 차라리 감옥에 갇히는 것을 선택한 여자의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콤플렉스는 그렇게 한 인간의 영혼을 잠식하고 삶을 통째로 삼켜 버리기도 한다. 여기 한 남자가 있다. 김신락이라는 본명 대신 ‘역도산’ 이라 불리던 남자. 그의 콤플렉스, 비밀 혹은 ‘회피하고, 방어하고, 숨기고, 위장하고, 남에게 상처를 주는 행동의 근거가 되는 수치심’의 정체에 대하여 나는 알지 못한다. 그저 “조선인이고 일본인이고 난 그런 거 몰라. 난 세계인이다”라는 말과, 아들에게까지 조선 출신임을 밝히지 않았다는 풍문을 통해 그의 가슴 안쪽에 자리한 좁고 어두침침한 방(房)의 무늬를 짐작해볼 따름이다.

남자는 자신의 콤플렉스를 정면 돌파하는 방법을 택한다. 일본 최초의 프로레슬러로서 그는 화려한 성공을 거두었다. 전후 일본의 좌절감과 무력감을 다독이기에 ‘작은 일본인이 큰 미국 놈을 거꾸러트리는’ 광경을 직접 보여주는 것보다 더 적절한 위무는 없었을 것이다. 시대는 언제나 비범한 누군가를 필요로 하고, 그에게는 시대와 야합해야 할 절실한 이유가 있었다. 시대와 개인은 피차 이용하고 이용당한다. 자신의 어둠을 감추기 위해 그는 일본대중의 민족영웅이 되어야 했고, 쏟아지는 환호와 밝은 스포트라이트 아래 노출되면 될수록 더욱 필사적으로 제 안의 암흑을 숨겨야 했다.

무형의 욕망은 결코 해소될 수 없으며, 꿈은 유예되고, ‘문은 늘 내 앞에서 닫힌다.’ 단호하게 닫힌 문의 저편에 도사린 것은 촛불 같은 희망이 아니라 스스로의 컴컴한 그림자다. 몰락은 내부로부터 비롯된다. 링 위에서 죽고 싶었던 남자 역도산은 술집의 화장실에서 칼을 맞는다. 역도산은 1963년에 사망했고, 같은 해 혜성처럼 등장한 ‘우주소년 아톰’이 일본 어린이들의 새로운 영웅으로 등극했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보다 작고 귀여우며, 일본 선진 과학기술의 비전을 담은 그 친근한 우상에 비하면 역도산이 발산하는 공격적인 남성성은 시대착오적인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의 마지막 승부는 그렇게 마감되었다.

그래. 역도산 식으로 말하자면 인생은 승부다. 모든 게임에는 반드시 승패를 가르는 순간이 있다. 하지만 그는 한 가지를 간과했다. 승리자도 패배자도 가차 없이 고독하다. 링은 어디에나 있다. 우리는 누구나, 링 위에 서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사십 년 전에 죽은 재일 조선인 프로레슬러의 이야기가 아니다. 2004년 12월 31일, 사각의 링 위에서 오늘을 버텨내고 있는 나와 당신에 대한 서늘한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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