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초 영화계간지 <영화언어>가 “예술영화, 대안영화의 한국적인 전범”으로 상찬한 영화가 있었다. ‘입시 지옥’에 갇힌 고등학생들의 일상과 고민을 담은 황규덕 감독의 <꼴찌부터 일등까지 우리 반을 찾습니다>(1989)가 그 영화였다. 대부분 비전문 배우들(크레딧엔 ‘청소년 연기자’라고 뜬다)이 엮어가는 이 영화는 당시 유행하던 하이틴 스타 원톱의 학원드라마와는 질감과 분위기, 무엇보다 노선이 달랐다. ‘일등부터 꼴찌까지’가 아니라 ‘꼴찌부터 일등까지’라고 뒤집어 붙인 제목이 암시하는 대로 영화는 입시 교육의 ‘현실’을 신랄하게 보여주었더랬다. 비슷한 시기에 <오! 꿈의 나라>를 내놓은 홍기선 감독과 더불어, “한국영화에 새로운 물결을 일으켰다”며 기대를 모은 황규덕 감독은 그러나, 한동안 이렇다 할 작품 활동을 하지 않았다. 그가 대전에서 초등학생들을 데리고 디지털 장편을 찍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온 건 2003년이었다.
그 영화가 그 이름도 고색창연한 <철수♡영희>다. 가물가물한 기억이긴 하지만, 서로 반갑게 손을 흔들고 선생님에게 고개 숙여 인사도 하던, 반듯하게 생긴 교과서 속 아이들이 철수와 영희였다. 그들은 ‘동시대성’과는 무관한 느낌이다. 철수, 영희와 함께 국어와 바른생활을 배우고 자란 ‘국민학교’ 세대부터, 아무리 세상이 변했어도 본질은 달라지지 않았을 요즘 ‘초등학교’ 세대까지,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겠다는 의지의 발현일까? 비교적 친절한 제목을 좋아하는 듯한 황규덕 감독은 대한민국 ‘표준’ 어린이들의 정겨운 일상을 따뜻한 손길로 펼쳐나간다. <꼴찌에서…> 이후 다시 학교 영화를 찍지 말아야지 했다지만, 운명처럼 다시 학교로 돌아온 그는, 리얼리티의 무게를 덜어낸 대신 노스탤지어의 온기를 보탰다.
영화 속 철수와 영희는 ‘부조화스런’ 커플이다. 부모를 잃고 할머니와 살아가는 영희(전하은)는 씩씩하고 영특한 아이. 할머니에게서 “네가 할머니 같구나”라는 말을 들을 만큼 조숙하다. 공부도 잘해서, 전학 온 지 얼마 안 돼 여자 반장으로 뽑힌다. 반면 철수(박태영)는 실내화를 입에 물고, 벌을 서는 게 주요 일과다. 영희를 좋아하는 철수는 영희네 꽃집 근처를 서성대기도 하지만, 친해질 기회를 찾지 못한다. 친구들 앞에서 망신당할 위기에 처한 영희를 도와준 뒤로 철수는 영희와 각별한 사이가 된다. 그러나 곧 위기가 닥친다. 철수는 영희가 떨어뜨린 생리대를 남 앞에서 건네주다가, 초경으로 가뜩이나 민감해진 영희의 미움을 산다. 음악을 좋아하는 영희는 동네 레코드점 오빠를 연모하고, 인기 많은 반장과도 부쩍 친해진다. “마음을 솔직하게 전하라”는 아빠의 충고에, 철수는 영희에게 전할 마음의 선물을 준비한다.
아이스께끼, 고무줄 끊기, 책가방으로 담 쌓기, 은밀한 편지와 선물, 얼레리 꼴레리 스캔들, 생리대와 브래지어에 얽힌 짓궂은 장난들. 커다란 사건은 없지만, 소소하게 이어지는 <철수♡영희>의 에피소드들은 정겹다. 어른이든 아이든 ‘악한’ 캐릭터가 없다는 것도 특징. 공주병 증세가 있는 유리가 유일한 ‘안티’이자 계층적 위화감을 조성하는 인물이지만, 반장 선거에서 영희에게 밀려난 뒤에 결투 신청을 하는 듯하다가 함께 고무줄 놀이를 하는가 하면, CD 플레이어를 도난당했다며 철수를 곤경에 빠뜨렸다가, 금세 자신의 실수였다는 걸 인정할 줄 아는, 근본은 착한 아이다. 또 다른 재미난 설정은 영희를 좋아하는 철수의 마음이 투영되는 판타지들. 철수는 외계 공주 영희가 우주선에서 내리는 꿈을 꾸고, 자괴감에 시달린 나머지 잉꼬의 울음소리를 “철수 바보”라고 듣기도 한다. 조숙하지만 그늘이 깊은 영희에 비해 철은 없지만 밝고 순수한 철수의 동심이 두드러지는 대목.
<철수♡영희>는 불균질한 영화다. 아마추어 배우들의 연기도 여기저기서 튀고, 순제작비 3억원의 한계로 보이는 투박한 영상도 아쉽다. 하지만 그만큼 미덕도 뚜렷한 영화다. 성장을 소원하는 마음과 거부하는 마음이 격돌하던 그 시절, 이성을 마음에 품기도 하고, 상처받기도 하고, 스스로 치유하기도 하면서, 한뼘 두뼘 키자람을 하던 그 시절을 돌아보게 만드는 것이다. 정진영이 연기(의무출연)한 학생 주임 ‘불독’이 학예회 무대에서 던진 자기고백적 대사는 그래서 더욱 짠한 여운으로 남는다. “4학년 하면, 이때부터 좀 어른스럽지 않나요? 돌이켜보면 저도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어른스러워졌던 것 같습니다. 학교 끝나면 집에 가기도 싫고, 지는 노을을 바라보면서, 내가 왜 이러구 사나, 사는 게 뭔가, 하는 상념에도 젖었습니다. 사는 게 뭐냐구요? 솔직히 그거,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갈수록 모르겠더라구요. 초등학교 4학년 때보다 더 모르겠습니다.”
아역 배우들
철수 ♡ 영희 = 태영 ♡ 하은
오해가 풀리고 다시 다정해진 철수와 영희의 데이트. 영희가 철수에게 묻는다. “너는 산이 좋아, 바다가 좋아?” “둘 다 좋아.” “산은 왜 좋은데?” “산꼭대기에 가면 도시락을 먹을 수 있잖아.” “그럼 바다는?” “바다에 가면 호텔이 있잖아. 호텔에 가면 뷔페 식당이 있거든.” 로맨틱한 분위기에서, 이런 천진난만한 대답을 늘어놓는 철수가 귀여워선지, 영희는 철수 볼에 쪽∼ 뽀뽀를 해준다. 이 문답은 황규덕 감독과 철수 역을 맡은 박태영이 사석에서 나눴던 대화를 그대로 옮긴 것이라고 한다. 이처럼 연기 초짜인 박태영의 풋풋함은 이 영화의 가장 큰 매력 중 하나가 됐다. 아무 생각이 없는 것 같기도 하고, 능청스러운 것 같기도 한 철수의 캐릭터가 잘 드러나는 또 다른 장면. 영희에게 나름대로 작업을 거느라 수학 과외를 부탁한 철수가, 수업 준비로 마음이 급한 영희 앞에 자랑스러운 얼굴로 “빅 파이∼”를 들이밀며 희희낙락하는 표정의 생동감이란. 시사회에서 가장 큰 폭소가 터졌던 장면이다.
박태영은 영화의 배경이 된 대덕초등학교 재학생으로, 학급 구성원 30명을 뽑는 오디션에 참거했다가 주인공 철수가 되는 행운을 누렸다. 학교 수업과 학원에 빠져볼 요량으로 오디션에 참가했던 그는 주인공에 뽑히자, 울면서 “그냥 엑스트라만 하겠다”고 사정했다는 후문. 그러나 “신토불이 토종다운 외모”에 <개똥벌레>를 구성지게 부르는 모습에 반한 황규덕 감독이 그를 놓아줄 리 없었다. 역할에 몰입한 나머지, 시험 답안지에 ‘박태영’이 아니라 ‘박철수’라고 써낸 해프닝도 있었다고. 정작 본인은 “영화 속 모습은 실제 나와 딴판이다. 감독님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며, 실제로는 훨씬 모범생에 가깝다는 걸 강조하고 다닌다.
영희 역의 전하은은 아역 연기자들 중에서 유일한 유경험 연기자다. <연애소설>에서 이은주의 아역으로 출연했고, <여섯개의 시선-그 남자의 사정>에서 미래형 아파트를 돌며 소금을 얻으러 다니는 꼬마를 연기한 바 있다. 함께 출연한 대덕초등학교 학생들보다 어린 2학년생이지만, 친구 같았고, 때론 언니나 누나 같아 보였던 건 아무래도 이런 ‘경력’의 힘이었던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