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트라이트]
모델에서 배우로, <내셔널 트레져>의 다이앤 크루거
2005-01-06
글 : 박혜명
사진 : 이혜정

할리우드에서 두편의 블록버스터 여주인공을 떠맡은 신인 여배우치고, 다이앤 크루거는 평범한 외모를 가졌다. 신작 <내셔널 트레져> 홍보차 제리 브룩하이머, 존 터틀타웁, 니콜라스 케이지, 저스틴 바사 등과 함께 지난 12월13일 내한한 그녀를 신라호텔 스위트룸에서 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비슷한 생각을 했을 것이다.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만큼 절세미인도 아니고, 톱스타의 데자뷰가 될 만한 이미지도 갖지 않았고, 생기 충만함 자체가 아름다움이라고 핑계댈 만큼 어리지도 않은 신인 여배우. 그러나 그녀는 할리우드에서의 커리어를 주인공으로 시작했다. 볼프강 페터슨의 <트로이>와 최근 개봉작인 <내셔널 트레져>가 그녀의 주연작이고 이 두편에 앞서 <라빠르망>의 리메이크작 <위커 파크>도 마찬가지다. 데뷔작은 2002년 TV영화 <피아노 플레이어>. 크루거는 프랑스에서 세편의 영화를 찍고 미국으로 건너왔는데, 할리우드에서 커리어를 세우기 전에도 그녀는 출연작의 긴 크레딧의 지루한 말미에 낀 적이 없다.

그녀가 대단한 비결이나 배경을 감추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런 순항이 아무에게나 찾아올 행운이 아님을 알면서도 다이앤 크루거는 오히려 아직 자신에게 대단한 일이 벌어졌다고 믿지 않는다. “난 내가 유명한 것 같지 않다. 맘 편히 길거리를 못 다닐 정도도 아니니까. 내가 주목받는 신인이 됐다니, 우스운 일이다. 주목받는 신인(the new ’it’ girl)이 무슨 뜻인가? 내 뒤에도 멋진 데뷔를 기다리는 수백명의 신인들이 있다. 지금의 자리도 내가 추구하고 노력했기 때문에 이른 것이 아니다.” 이 말은 젊은 날을 다 바쳐도 주류 할리우드에서 짜릿한 스포트라이트 한번 못 받아본 이들에겐 오해를 살 여지가 있다. 그러나 그녀는 기자들 앞에서 필요 이상의 웃음을 흘리지 않고 해야 할 말을 굳이 돌려서 하지 않는 사람이다. 현실주의자적인 무덤덤함과 냉정함이 솔직하게 드러나서 인간적이다. 대하기는 까다롭지만 대답의 이면을 의심할 필요는 없다.

독일에서 태어난 크루거는 오랫동안 발레를 공부했다. 독일에 있는 영국계 학교 ‘로열아카데미 오브 런던’에 다니다가 부상으로 발레를 그만두면서 택한 길이 모델이었다. 열여섯살에 파리로 건너가 모델로 이름을 알리며 활동하던 중 <제5원소>의 여배우를 물색하던 뤽 베송과의 만남이 지금의 일을 시작한 계기가 됐다. 잡지를 보고 그녀에게 미팅을 요청한 뤽 베송은 결과적으로 크루거를 캐스팅하지는 않았지만 그전까지 배우란 직업을 생각도 해본 적 없던 그녀는 그 길로 진로를 틀었다. “모델 일은 연기에 비하면 지적이지 않다. 대신 도전이 많이 된다. 어린 여자들에게는 해볼 만한 일이다. 세계 대도시를 다녀볼 수 있고 경제적으로도 쉽게 독립할 수 있으니까. 나도 그 일로 돈을 벌어서 연기학교에 갔다. 그러나 다시 그 직업으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그녀는 아주 단호한 편이다. <트로이>의 헬렌이 파리스의 손에 이끌려 스파르타를 떠날 때에 그리 연약해 보이지 않았던 건 남에게 쉽게 굴복당할 것 같지 않은 다이앤 크루거의 인상 때문이다. <내셔널 트레져>의 아비게일 체이스도, 악당을 앞지르거나 악당한테서 도망치려는 분주한 벤자민 프랭클린 게이츠(니콜라스 케이지)에게 부담스러운 짐짝 같은 인물로 비치지 않는다. 화려한 출발의 신화를 믿지 않는 그녀는 앞으로도 유럽과 미국을 오가고, 미국 내에서도 주류와 독립영화를 오갈 것이다. 다이앤 크루거는 3년 전 결혼한 남편 기욤 카네와 함께 최근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프랑스영화 촬영을 마쳤고, 지금은 “저예산 독립영화”라는 아그네츠카 홀랜드의 신작 <카피잉 베토벤>(Copying Beethoven)을 촬영 중이다. 그 때문에 긴 블론드도 짧게 자른 거라고 건조하게 대답한 그녀에게서, 똑똑하게 서 있는 자기 주관을 엿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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