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남편이 가장 싫어하는 단어는 ‘노력파’다. 본인의 학창 시절 별명이었던 탓이다. ‘노력파는 좋은 의미 아니야?’라고 생각하는 분도 계시리라. 그런 분은 한번도 제대로 노력해보지 않은 사람임에 틀림없다. 문자 그대로의 뜻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의미의 ‘노력파’가 무엇인지 알고 싶다면 <묻지마 패밀리>의 ‘내 나이키’ 편을 보시라.
밤낮없이 예습복습을 하고 밥상머리에서도 책을 안 놓는, 그러면서 “형은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는데 어떻게 34등을 하냐, 반에서”라는 이야기를 동생에게 듣는, 그리하여 부모로부터 야단칠 권리도 빼앗고(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어쩌란 말이냐) 다만 깊은 시름에 빠지게 만드는 임원희의 캐릭터가 노력파의 실체다. 기실 노력파는 미디어에서 호도하는 것과 달리 전혀 칭찬과는 거리가 먼, ‘해도 안 되는 불쌍한 인간’의 뜻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얼마 전 우연히 케이블 텔레비전에서 이 영화를 다시 보게 되기까지 나는 임원희 캐릭터를 완전히 까먹고 있었는데(난 노력파가 아니다. 믿어달라) 나의 남편, 그의 대사뿐 아니라 행동의 디테일까지 세세히 기억하고 재현하며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하더란 말이다. 그리고 그는 나에게 자신이 노력파라는 걸 남들에게는 말하지 말라고 아주 심각한 어조로 부탁했다. 나는 노력파는 부끄러운 게 아니라 다만 불편할 뿐이라고 말했지만 그건 위안도 안 되는 공허한 말일 뿐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런 이 세상의 모든 노력파를 두번 죽이는 영화가 개봉했다. <인크레더블>이다. 인크레더보이. 어린 시절 이미 화력으로 방방 뛸 수 있는 스프링 신발을 만든 그는 재능있는 소년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는 재능있으나 영웅의 피는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민간인이었던 것. 민간인이 영웅을 따라가기 위해서는 죽어라고 노력할 수밖에는 없었던 것. 자신의 우상이었던 미스터 인크레더블에게 면박당한 뒤 복수심을 성취동기삼아 그는 엄청난 괴력의 무기를 창조해내는 훌륭한 과학자가 된다.
그러나 영화는 인크레더보이의 근면성, 성실성을 형편없는 콤플렉스의 산물로 변질시킨다. 가장 좋은 건 인크레더보이의 말대로 누구나 노력해서 슈퍼히어로가 되어 그 이상의 슈퍼히어로가 없는 세상을 만드는 거다. 평등사회란 그런 거다. 그러나 <인크레더블>은 노력파가 타고난 천재나 영웅의 영역을 건드리는 걸 역겨워한다. 한마디로 왕후장상의 씨는 따로 있으니 노력파는 까불지 말라는 거다.
영화를 보고 나서 또 한번의 충격. 내 친구들 너무 재미있다고 다만 해맑은 웃음으로 즐거워하는 거다. 왜 나만 기분이 나빴던 거지? 나도 노력파인 건가? 아니다. 이 모든 걸 없던 이야기로 해달라. 나도 그냥 재미있게 봤다. 헤헤. 나, 노력파가 아니다. 정말이다(강한 부정… 끄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