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여행을 떠나야겠군, 눈을 뜨자마자 그렇게 생각한다. 커피를 내려 텀블러에 담고, 캔버스 끈을 조여 묶는다. 지하철 정액권을 체크하고, 펜과 수첩을 챙겨넣는다. 뉴욕의 겨울 바람과 싸우려면 든든한 목도리도 필요하다. 도시 곳곳에 숨어있는 영화의 흔적들을 찾아나서는 데이-트립은 이 정도 준비물이면 충분하다. 물론 나의 정거장은 <스파이더 맨> 같은 블록버스터영화에서 시도 때도 없이 등장하는 타임스 스퀘어나 유명세 덕에 관광객들로 버글거리는 ‘세렌디피티’ 같은 카페가 아니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도, 록펠러 센터도 아니다. 이것은 생활공간의 일부가 되어버려 그냥 스쳐 지나가는 곳, 누군가 여기서 영화를 찍었다고 해도 믿지 못할, 사소한 공간들에 대한 소박한 확인이다. 예전에 드라마 <네 멋대로 해라>를 왜 그토록 좋아했었나를 생각해보면, 그 이유 중 하나가 드라마를 찍은 장소 때문이었던 것 같다. 내가 밥을 먹고, 술을 먹고, 친구와 잡담을 나누고, 일없이 방황하던 동네의 이야기. 홍대의 낯익은 길가를 터벅터벅 걸어가는 그들을 보고 있다 보면, 이나영이 전경으로 양동근이 복수로, 저들의 삶이 드라마가 아니라 실제처럼 느껴졌었다.
맨해튼 미드타운, 34가의 나의 작은 아파트에서 걸어 나와 8 애비뉴쪽으로 향하면 ‘호텔 뉴요커’가 보인다. 유행하는 부티크 호텔도, 쉐라톤 같은 고급호텔도 아닌 이 회색의 을씨년스러운 건물 연회장에는 <라디오 시대>와 <브로드웨이를 쏴라>를 찍던 우디 앨런의 수다와 한숨이 스며 있다. 매주 커다란 빨래가방을 들고 묵은 빨래를 하러 가는 9 애비뉴 코인세탁소 옆 파키스탄 식당은 한 때 스코시즈가 <코미디의 왕>을 촬영했던 ‘클럽 478’이었던 자리다. 저기 홀로 끼니를 때우고 있는 이목구비 뚜렷한 아저씨를 보고 있자니 귀한 청동기 유물로 밥을 지어먹는 사람을 보는 것 같다. 동쪽으로 몇 블록 더 올라가면 그랜드 센추럴 역이다. 프리츠 랑의 흥미진진한 누아르 <우먼 인 더 윈도우>에서 에드워드 G. 로빈슨은 조금 뒤 일어날 엄청난 살인 사건을 예상하지 못한 채, 그 역에서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과 이별한다. 지하철을 타고 다운타운 서쪽으로 내려가면 내가 아르바이트를 하는 가게가 있는 소호에 다다른다. <특근>(After hours)은 <예수의 마지막 유혹>의 제작에 들어가지 못해 좌절하던 마틴 스코시즈가 가벼운 마음으로 찍었던 영화인데 결국 스코시즈는 그 영화로 칸에서 감독상까지 받게 되었다. 이 밀도있는 드라마는 워킹 타이틀이었던 ‘소호에서의 하룻밤’에 걸맞게 한때 예술가들로 북적이던 이 작은 구역을 벗어나지 않고 촬영되었다.
폴과 마시가 처음 만나 헨리 밀러의 <북회귀선>에 대한 대화를 나누던 식당 ‘문댄스 다이너’ 도, 폴이 올라버린 지하철요금 때문에 발을 동동 구르던 스프링 스트릿 지하철역도 아직 그 자리에서 그대로 새로운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마치 유적지를 보듯 찬찬히 그곳을 살펴보고 지하철역을 빠져나오니 예쁘장한 아가씨 하나가 배낭을 메고 눈앞을 휙 지나간다. 클레어 데인즈다. 누군가 그녀가 이 동네에 살고 있다고 귀띔해준다. 여행은 늘 뜻밖의 행운을 가져다주게 마련이다. <비열한 거리>의 오프닝신에서 부감으로 보이던 리틀 이탈리아의 풍경을 뒤로하고 다시 서쪽으로, 웨스트 빌리지로 내려온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곳은 <워킹 앤 토킹>에서 웨이터가 앤 헤이시에게 작업을 걸던 바로 그 카페다. 그 짧은 세월은 이 카페의 이름과 인테리어를 바꾸어놓기는 했지만, 그래도 눈앞에 보이는 이 길에서 몇년 전 누군가의 카메라는 열정적으로 그녀들의 우정이 균열되고 다시 복구되는 과정을 담고 있었으리라.
겨울 맨해튼은 오후 4시면 어둑어둑해진다. 아무렇지도 않게 하루가 간다. 글을 다 쓰고 나니 마치 내가 준상이 집을 방문하는 일본의 ‘욘사마’ 팬처럼 느껴진다. 어떤 이들이 보기엔 하나 대단할 것 없는 여행이다. 그러나 열광하는 대상의 흔적을 찾아가는 길은 무엇이라도 순례다. 이제 이 카페 문을 열고 또다시 거리로 나서면 여기저기 조용히 누워 있던 내 아름다운 우상들이 인사를 건넬 것이다. "안녕, 우디" "하이, 마틴" " 당신은 스파이크 리군요" 저기 리무진 운전석에는 오늘 사냥할 아가씨를 찾아 헤매는 알피(주드 로)가, 여기 스타벅스에서는 캐리가 노트북을 두드리고 있구나. 어쩌면, 어쩌면, 어쩌면, 브로드웨이 13번가 한 가게에서는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가 해지기를 기다리지 않고, 우연히 마주쳤을지도 모를 일이다.
열거하기에도 지쳤다.
서른 한 살의
데이 트리퍼
이것은 가슴 벅찬 하이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