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운명을 만들어가는 엄지공주, <극장전>의 엄지원
2005-01-13
글 : 이종도
사진 : 오계옥

부엌에 쭈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우며 앞으로의 더부살이를 근심하던 정애(<똥개>)도, 금기의 욕망을 화사한 연주복 아래에 숨겨두고 있는 수현(<주홍글씨>)의 이미지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친구가 모는 스쿠터 뒤에 몸을 싣고선 “그런다고 내가 주나”라며 반어법으로 욕망을 말하던 정애나, 바르르 떨리는 입술로 간신히 박동치는 욕망을 드러내는 수현은 더욱 아니었다. 그렇다면 홍상수의 극장 앞(前,<극장전>)으로 걸어나와 극장 이야기(傳)를 찍는 배우 영실?

앳된 스무살 안팎의 여자인 정애와 영실을 천연덕스레 하면서 이제 막 스물아홉이 된 게 너무 억울하다고 투덜거리는 여자, 엄지원. 그의 별명은 현재 천재소녀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야물딱지게 떨어지니 홍상수 감독도 그렇게 부르고 싶지 않았으랴. 언론에 공개된 <극장전> 촬영현장 사진에서 엄지원이 예뻐 죽겠다는 표정으로 거의 눈이 감겨 있는 홍상수 감독 얼굴을 떠올려보라.

배우도 마찬가지다. 영화를 하면서 행복한 느낌이 처음이었노라면서 감격해한다. 그런데 이상한 건 30% 넘게 찍고도 “이 여자(영실)가 누구인지도 모른다”면서 배우가 배시시 웃고 있다는 거다. 시나리오 없이 그날그날의 쪽대본만 나오는 홍상수 감독의 작업방식이 처음엔 불안했다면서 말이다. 아니, 그런데 이제는 소풍가는 아이처럼 설렌다고? 홍상수 감독은 예전에 했던 영화의 캐릭터를 다 털어버리고 ‘놀라’는 주문만 했다고 한다. “놀다보니 어느새 새로운 에너지가 생겼어요. 기적이죠. 4회차 촬영까지는 잠을 못 잘 정도로 걱정했어요. 이 기적 같은 느낌이 놀라워 일기에 적었어요.”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홍상수 감독과의 만남도 운명이고, 지리학도에서 영화배우가 된 것도 운명이다. 그러나 천재소녀는 운명이 명하는 대로 가는 사람이 아니라 운명을 만들어가는 사람이라 붙은 별명인 듯하다. 남들보다 늦은 나이에 오히려 에둘러가는 발걸음도 그렇다. 다른 곳에서 오는 시나리오도 덮어두고 읽지 않는다. “발버둥쳐서 되는 일이 아니니 느긋하게 지금 하는 것에만 집중하는 거”라고 한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부터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까지 모두 개봉관에서 봤지만 모두 그저 우연히 본 것일 뿐이었다. 홍 감독을 만난 뒤 이 영화들을 다시 봤다. 그리고 열배나 더 웃었다. “너무 웃기다”며 어깨를 들썩이고 머리를 젖히는 웃음으로 엄지원은 홍상수 영화세계를 정리한다. “퉁퉁하고 귀여운 곰돌이 푸 같지만 삶을 꿰뚫는 통찰력과 혜안이 있으세요.” 정애나 수현을 보면서 홍 감독은 어떤 걸 엄지원에게서 읽어냈을까.

엄지원은 자신을 택한 이유는 물어보지 않았다고 답했다. 제작자이기도 한 홍 감독과의 약속대로, 영화 내용도 알려드릴 수 없노라고 했다. 내면에서 무엇인가를 분출하고 싶은 욕구로 꽉 차 있을 때 <극장전>을 해보지 않겠냐는 연락이 왔다는 얘기를 대신 들려줬다. 그리고 기적 사이로 흘린 두번의 눈물을 보여줬다. 촬영이나 미팅을 마치고 영어과외를 갈라치면 감독은 “과외는 개뿔! 술이나 마시고 가라. 영어는 나한테 배우라”며 소매를 붙잡았다고 한다. 너무 술을 먹여서 숨을 못 쉴 정도로 마셨고 그래서 펑펑 울었고, 약속한 것과 달리 하지 않기로 한 장면(도대체 뭘까?)을 찍자고 해서 또 한번 울었다. “너무 밉지만 안 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어요. 그래서 여우라니까.” 감독은 ‘귀여운 엄지 공주 수고했다’는 문자메시지로, 촬영장에서 꽁꽁 언 엄지원의 마음을 녹여주었다고 한다.

의상협찬 텔레그라피 비스, 쥬얼리 프시케, 블루종, 제씨· 헤어 메이크업 박승철 헤어스튜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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