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현정의 연기는 여전히 매력적이었다. 10년만에 컴백해 출연한 드라마 <봄날>에서 그는 같은 섬마을에 사는 자기 또래의 유부녀가 가출하려는 걸 붙잡는다. 그 유부녀가 자기 손목을 꽉 잡고 놓지 않는 고현정의 손을 피가 나도록 깨문다. 아픔을 씹어 삼키며 손목을 놓지 않는 고현정의 표정은 많은 걸 담고 있었다. 상대방에 대한 진심, 단호하고 고집 센 성격, 깨물린 손의 아픔 따위는 능히 견딜 수 있을 만큼 그 스스로 깊은 아픔을 지니고 있다는 암시까지. 순식간에 자기가 연기하는 극중 인물에 대한 시청자의 연민과 신비함을 끌어내는 그 표정은, 우리가 좋은 배우에게 열광하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이런 고현정의 연기는 <모래시계>의 연장선 위에 있는 것이기도 하다. 세파에 대처하는 내성을 갖추지 못한 여자의 자기 방어벽이 역으로 타인의 연민과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유형이다. 연기를 중단했던 10년 동안 고현정은 20대에서 30대가 됐지만, 그의 연기 유형은 20대 여자에게 더 어울리는 것이다. 그의 얼굴도 30대로 보이지 않는다. 고현정은 이 드라마를 맡기 전에 허진호 감독의 영화 <외출>에 결혼한 지 3~4년 지난 30대 여성으로 출연할 뻔했었다. 그가 30대 여성을 어떻게 연기할지 궁금했는데 아쉽게도 기회가 사라졌다.
세속 저편에서 순수함을 자랑하는 20대 여자 말고 세속에 발 담그고 몸부림치는 30대 여자 캐릭터를 한국 영화에서 만나기란 쉽지 않다. <외출>은 고현정 자리에 손예진을 캐스팅하면서 인물의 직업 등 몇몇 설정을 20대에 어울리도록 고치고 있다. 에릭과 김윤진이 출연할 형사액션물 <12월의 일기>는 이 둘 외에, 중학생 아이를 둔 유부녀 형사 역을 캐스팅하다가 난항에 부닥쳐 설정을 아이 어머니에서 이모로 바꿨다. 물론 두 영화 모두 이런 설정의 변화가 영화의 흐름을 크게 바꾸지 않는다는 게 제작사쪽의 설명이다.
그래도 30대 여자 캐릭터를 주연으로 세우는 기획이 여의치 않은 건 사실이다. 30대에서 지명도 있는 여배우가 많지 않고, 여배우가 아이 어머니 역을 꺼리는 경우도 있고, 스타 캐스팅이 되지 않으면 투자자가 붙지 않는 충무로의 관행이 이를 부추기고 있다. 기획이 적으니 30대 여배우의 인재풀이 커지질 않고, 그래서 악순환이 이어진다. 그러다보니 올해 기대작으로 꼽히는 한국 영화의 절대 다수도 남자 영화다. 남자 캐릭터는 40대, 50대까지 주연으로 올라서는데 여자 주연 캐릭터는 20대에 머문다. 30대 여자 캐릭터를 연기할 30대 여자 배우를 신인 중에서 뽑는 과감한 제작자가 어디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