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월드 오브 투모로우>의 시나리오를 쓸 때, 폴리 퍼킨스 캐릭터의 모델로 삼았던 것은 캐서린 헵번, 로렌 바콜 등 우아하고 침착하며 강렬하고 지적인, 과거의 여배우들이었다. 폴라를 완벽하게 소화한 기네스는, 이 모든 조건을 연기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원래부터 그런 사람이었다.”-<월드 오브 투모로우>의 케리 콘랜 감독
1940년대 뉴욕 맨해튼과 샹그리라, 구름 속 비행장과 심해의 기지를 누비는 모험활극 <월드 오브 투모로우>는, 그 시대 사람들이 상상했을 법한 미래를 보여준다. 흐릿하게 낡은 듯한 질감의 화면 속에서 주드 로, 안젤리나 졸리 등은 빛을 발한다. 그러나 과거 할리우드영화의 정서마저도 그대로 재현한 이 영화에서 가장 돋보이는 배우는 단연, 기네스 팰트로. 그가 연기한 폴리 퍼킨스는 투명하게 빛나는 피부에 붉은 입술, 거짓말처럼 완벽한 금발이 돋보이는 열혈기자. 거대한 로봇 앞에서도 기죽지 않는 강단과 종종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지르는 인간적 면모를 동시에 지닌 그의 모습은, 절로 30, 40년대 할리우드의 고전영화 속 주인공들을 떠올리게 만드다. 실제로 그가 <다이얼 M을 돌려라>의 리메이크작 <퍼펙트 머더>에 출연했을 때는 그레이스 켈리에 견주어졌고, <셰익스피어 인 러브>의 존 매든 감독으로부터 “화려하고 지적인 일상의 분위기를 완벽하게 재현할 수 있는 배우”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그리고 이제 머지않은 미래에는, 완벽에 가까운 고혹미로 한시대를 풍미했던 전설적인 여배우 마를린 디트리히가 그의 몸을 빌려 스크린 속에서 부활할 예정이다.
“나는 관객동원을 보장하는 스타가 아니다. 그리고 한편당 2천만달러씩 받을 수 있는 영화에는 흥미가 없다. 감독들이 나를 캐스팅할 때는, 한명의 예술가로서 내가 그들에게 뭔가를 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 ) 가끔 나는 뻔히 모험적인 선택임을 알면서도 일을 저지를 때가 있다. 나는 그런 식으로 본능을 따라왔고, 이로 인해 가장 흥미로운 경험들을 할 수 있었다.”
음침한 스릴러(<쎄븐>)와 한없이 가벼운 멜로(<바운스>)를 오갔고, 발랄한 중매쟁이(<엠마>)와 자살로 생을 마감한 비운의 여류시인(<실비아>) 모두를 소화했으며, 기이하기 그지없는 가족영화(<로얄 테넌바움>)를 만든 웨스 앤더슨과 시종일관 얄팍한 유머를 구사하며 통렬한 풍자를 날리는 코미디(<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의 대가 패럴리 형제가 동시에 선택한 팰트로는 13년 동안 총 27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그의 변화무쌍한 필모그래피에서 찾을 수 있는 유일한 공통점은, 그 작품들이 모두 비교적 작은 규모로 제작, 배급됐다는 사실. 그러므로 파라마운트에서 제작된 박스오피스 1위 영화 <월드…>는 그의 생애 첫 번째 블록버스터에 해당한다. 그러나 돈은 없지만 재능이 넘치는 독립영화 감독 콘랜이 10년에 걸친 노력 끝에 완성한 이 영화의 독특한 배경을 떠올린다면, <월드…> 역시 그의 일관된 선택의 기준에 부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자신만의 재능으로 무장한 감독들과, 재기발랄한 영화를 만들어가는 그의 행보는 당분간 계속될 예정. 최근에 그는 퓰리처상을 수상한 희곡 <증거>의 주연으로 연극무대에 섰고, 이때 함께 작업했던 존 매든(<셰익스피어 인 러브>)이 연극을 영화로 옮길 때도 같은 역을 맡았다.
“배우로서의 나와 일상적인 나는 분명히 구분되어야 한다. 타블로이드판 신문 1면을 장식하고픈 맘은 추호도 없다. 유명인들이 즐겨 참가하는 행사들, 이런저런 시사회와 파티, 오프닝 행사 등은 피하고 싶은 일들이다.(…) 내 딸 애플의 안전과 일상을 비롯해 그 어떤 것도 희생시키지 않을 생각이다. 그 때문에 내가 배우라는 직업을 포기해야 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유명 TV프로듀서 겸 감독이었던 아버지(브루스 팰트로)와 스타배우였던 어머니(블라이드 대너) 사이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할리우드의 유명인사들과 친분을 쌓아왔던 그는, 20대 중반에 한차례 오스카를 손에 넣었다. 브래드 피트와 벤 애플렉을 사귄 뒤에는, 영국의 록밴드 콜드 플레이의 보컬 크리스 마틴과 열애 끝에 결혼에 성공했다. 그뿐인가. 5개 국어를 구사할 줄 아는 팰트로는, 인터뷰 때마다 촌철살인의 유머와 능수능란하게 민감한 부분을 피해가는 영민함을 자랑한다. 이 정도 되면, 외모뿐 아니라 지적 능력, 취향, 출신성분까지 완벽한 그가 세간의 시샘을 받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 “거들먹거리고 제멋대로인 공주”, “얼음나라 공주” 등은 그가 흔하게 들어야 했던 몇 가지 수식어 중 극히 일부분이다. 하다못해 팰트로가, 지난해 5월 태어난 딸에게 ‘애플’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에 대해서도 이러쿵저러쿵 말을 들어야 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는 세상 모두의 사랑보다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몇몇 이들의 믿음을 택할 것이다. 그게 지금까지 팰트로가 걸어온 길이나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