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뉴스]
[정이현의 해석남녀] <미스터 인크레더블>
2005-01-21
글 : 정이현 (소설가)

그 남자는 매우 평범한 생활인처럼 보인다. 아니, 사실 그렇다. 평범하다는 표현이 진부할 만큼 그는 지루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대개의 사십대 남성이 그렇듯 복부비만은 위험수치에 다다랐으며 만성 어깨 결림과 위장장애, 심신 무기력증에 시달리고 있다. 결혼 십오년 만에 겨우 작은 아파트를 장만했으나 다달이 들어가는 대출금 이자와 끝없는 애들 교육비 때문에 ‘똥차’를 바꿀 엄두는 내지도 못한다. 회사에서는 어중간한 나이, 어중간한 커리어로 명예퇴직 당하기 딱 좋은 상황이라 각별히 몸을 사리는 중이다. 안 그래도 요즘 틈만 나면 자신을 꼬나보는 상사의 눈초리가 예사롭지 않아, 밤에 잠이 안 올 지경이다.

시시껄렁한 일상을 딛고 인류 구하는 미국판 영웅 ‘안 봐도 뻔할뻔’

늦은 밤 자리에 눕거나 혼자 운전을 할 때면 가끔 그 남자는 저도 모르게 낮은 한숨을 뱉어내곤 한다. 그의 나이 마흔 다섯. 예전에 남자는 자신이 이런 식으로 항아리의 멸치젓 삭아가듯 늙어가게 될 줄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한 때 그에게도 눈부신 시절이 있었던 것이다. 때는 바야흐로 이십여 년 전! 그렇다. 가 버린 80년대, 그는 전설의 투사였다. 투철한 의식과 탁월한 전략으로 일학년 때 이미 조직의 핵심으로 부상했으며 이학년 때는 적의 심장부를 점거해 싸웠고 삼학년 때는 최장기 단식 투쟁의 기록을 세웠다. 그는 한번도 개인의 안위를 염려하지 않았고 오직 조직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다. 그는 단호하고 용감했다. 틀림없이, 그렇다고 생각했다.

1990년대는 빠르게 찾아와 빠르게 지나갔다. ‘동지’로 만나 결혼한 아내와의 사이에 아이가 셋 생겼다. 아내는 바가지 긁던 마누라의 시기를 일찌감치 지나 이제는 다만 ‘애들 엄마 노릇’을 위해 제 안의 열정을 불태우는 사람이 되었다. 사춘기에 접어든 큰 딸애는 언제나 귀찮고 짜증난다는 표정을 거두지 않은 채 방문을 쾅 소리 나게 닫고 들어가 틀어박혀 있다. 열 살짜리 아들 내미는 학교에서 유명한 말썽꾸러기이며 벌써 집 밖의 세계로 달려 나가고 싶어 안달복달하는 눈치다. 한 순간의 실수로 생긴 막둥이 갓난쟁이를 떠올리면 가슴이 답답해져 온다. 저 녀석이 스무 살이 되었을 때 자신은 환갑이 훨씬 지난 중늙은이가 되어 있을 것이다. 제대로 된 부모노릇을 어디까지 해줄 수 있을까. 이십 년 전의 제 모습이 아득한데, 어떻게 이십 년 후를 감히 예상한단 말인가.

좋은 아빠 역할을 해보라는 아내의 강권에 밀려 아들놈을 데리고 영화를 보러 갔던 날. 그가 깜깜한 극장 안에 아이를 남겨두고 슬그머니 로비로 빠져 나온 건 그저 머리가 아파서였다. 안 봐도 뻔했다. 대형스크린 속의 미국 판 ‘미스터 인크레더블’은 시시껄렁한 일상을 떨치고 일어나 다시 영웅의 자리를 찾고, 인류를 구원할 것이다. 흥, 미국식 해피앤드는 쉽기도 하군. 마누라 몰래 꼬불쳐 두었던 담배 한 개비를 쓸쓸히 꺼내 물었을 때 누군가 그를 향해 빽 소리를 질렀다. “아저씨. 여기 금연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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