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영화]
말론 브랜도, 나의 영웅, <지옥의 묵시록>
2001-02-02

초등학교 때였을 것이다. 이불 속에 꼭 박혀 있는 나를 밤 10시 즈음에 꼭 흔들어 깨우는 손길이 있었고, 그때 내 귀에 아련히 들리는 소리가 있었으니…. 그것은 <주말의 명화>니, <명화극장> 같은 프로그램의 오프닝 사운드였다. 아버지셨다. 날 깨운 아버지는 날 부여잡고 같이 이부자리에 누워, 나를 할리우드 키드로 만들어버리셨다. 지금은 저 세상으로 가셨지만…. 그중에서도 나를 사로잡은 영화는 바로 웨스턴 무비였다.

시가를 물고 카우보이 모자를 쓴 채 어눌하게 대사를 읊조리는 게리 쿠퍼의 온화한 미소와 존 웨인의 찌푸린 미간과 버드 랭커스터의 반짝이던 눈빛과 웃음. 를 보고 광분했으며 <쉐인>을 보고 울었었다. 나는 50∼70년대의 영화를 사랑한다. 흑백영화의 뿌연 색채가 신비감을 더했는진 모르지만, 그 옛날 험프리 보가트나 로버트 테일러, 잉그리드 버그먼은 어찌 그리 우수에 찬 눈빛을 지녔는지…. 우리 영화의 남궁원, 최무룡, 허장강 그분들 역시 서 있기만 해도 연기 그 자체였다. 예를 들어 <고양이>란 프랑스영화에서 장 가뱅은 얼굴 주름으로 영화의 대부분을 연기하고 있었다. 물론 지금의 배우들이 연기를 못하는 건 아니다. 우리 영화 에서 신구 선생님의 아버지 연기는 그 자체로서 이미 모든 걸 말해주지 않는가? 그러나 난 지금껏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라스트신에서 마지막 게리 쿠퍼의 표정, 그 이상의 연기를 본 적이 없다. ‘무표정’, 거기에 모든 게 담겨 있었다.

연기는 자기를 비워내고 순수의 감정과 지극히 자연스러움의 조화가 담겨져야 한다. 또 배우의 살아온 세월과 연륜이 더해져야 하고, 말은 쉽지…. 문득 내게 배우란 이름조차 부담스럽고 부끄럽다. 쓸데없는 소리했다. 개인적 사견 집어치우고. 다시 세월이 흘렀고 난 고등학고 연극반에서 연극을 했다. 그때 비로서 내 인생의 영화가 나타났다. 말론 브랜도의 <지옥의 묵시록>. 충격적이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이 영화의 진정한 가치를 느낀건 제대 뒤였다는 것이다. 마치 <삼국지>가 읽는 나이에 따라 심도가 깊어지듯 제대 뒤 난 이 영화의 마니아가 돼버렸다. 얼마 전 <라이언 일병 구하기>가 엄청난 자본과 특수효과, 리얼한 기술력으로 혀를 내두르게 했지만 결론은 미국식 영웅주의며 서막은 다큐멘터리요, 후막은 아메리칸 멜로다. 물론 좋은 영화다. 하지만 전쟁은 인간갈등의 극치다. 총탄이 빗발치고 배가 고픈데 낭만이 어디 있겠는가?

인간은 환경에 따라 천사도 되고 악마도 돼버린다. 등 따스고 배부른데 미친놈이 아닌 이상에야 나쁜 짓 하겠는가? (예외도 있다) 굶으면 누구나 변한다. 개개인의 시간차와 표현방식의 차이일 뿐. 그러니까 내가 무슨 6·25 참전용사쯤 되는 것 같다. 난 그냥 DMZ 현역 보병 출신이다. 그러나 그때 직접 느꼈다. 인간이 얼마나 환경에 따라 잔인해질 수 있는가를. <지옥의 묵시록>은 이러한 인간, 인간본연의 리얼리티, 본성 광기 등을 잘 그려냈다. 개인적 취향이지만 난 인간본성의 모순을 그려낸 영화를 좋아한다. 인간본연의 모습이야말로 추악함, 잔인함, 위트, 슬픔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지옥의 묵시록>은 명령을 거부하고 자신의 왕국을 건설한, 광인이자 촉망받던 대령 말론 브랜도를 찾아 사살하는 임무를 받은 마틴 신이 그를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영화다. 주인공이 그를 찾아가며 느끼는 전쟁의 참상은 정말 기막히다. 그중 압권은 그가 한 치열한 전장을 거치게 되는 장면이다. 그 전쟁터는 아군이며 적군의 개념이 아닌 생존의 법칙만이 있고 애국이며 충성은 이미 사치가 되어 있다. 병사는 자신의 직속 상관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생존 자체와 광기만이 존재하는 아수라장이었다. 인간이 전쟁을 만나면서 겪는 폐해를 정말 극명하게 보여준 것이다. 또 하나 나를 휘어잡은 이 영화의 매력은 말론 브랜도다. 그는 나의 영웅이다. 어찌그리 멋있게 생겼는지. 온갖 미사여구를 다 갖다 붙여도 모자라는 그의 매력. ‘장중함’이다. 배우가 기막힌 연기력을 소유했다고 하여도 이 배우의 개인적 매력은 당해낼 재간이 없다. 이 점, 난 이럴 때 연기를 백번도 더 포기하고 싶어진다. 난 그의 <워터프론트>를 보고 소녀처럼 가슴이 뛰었고 를 보고 가슴아파했다. 차라리 제임스 딘처럼 일찍 죽지. 여러분은 아는가? 현세의 날고 기는 배우나, 심지어 제임스 딘조차도 그를 표본으로 삼고 그의 연기를 흠모했다는 사실을. 지금의 100kg이 넘는 거구가 측은하기도 하지만 그의 속사정을 알면 이해가 간다. 그는 말년에 불운한 배우다.

얘기가 길었다. 생각보다 주저리주저리 쓰다보니 지면 채울까 걱정했는데 되레 모자란다. 참 재미있다. 살다보니 <씨네21>이 나한테 이런 부탁도 하고, 배우가 아주 ‘쬐끔’ 돼가나보다. 배우해야지. 열심히 살아야겠다. 이 글을 끝까지 읽어주신 분들께도 감사드린다.

임원희/ 영화배우·<간첩리철진> <커밍아웃> <다찌마와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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