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그때 그 사람들>의 재구성 [2]
2005-01-25
글 : 이종도

코미디가 아닌, 인간의 본성에 충실한 드라마

#3. 실내. 궁정동 별관 복도 화장실-밤
(한쪽 다리는 완전히 바지를 뺀 채 변기에 앉아 있는 박 부장. 갑자기 휴지도 사용하지 않고 바지를 입고 물을 내린다.)
박 부장/ 제길, 되는 일 하나 없네.

이 영화는 코미디영화인가. TV와 인터넷에서 방영 중인 이 작품의 예고편에서 백윤식이 화장실에서 짓는 표정과 묘한 효과음은 자체로 작은 하나의 드라마를 만들고, 이 작품이 당시 권력 핵심부에 대한 희화화가 아닐까 예상하게 한다.

그러나 임상수 감독은 이 영화가 그저 코미디영화만은 아니라고 말한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몽>을 보면 주인공 도시로 미후네가 칼싸움을 하다가 한 여자의 남편을 죽이는 장면이 있다. 도시로가 이 장면을 회상할 때는 사무라이풍으로 멋진 결투가 벌어진다. 이 사건을 몰래 봤던 나무꾼 증언에 따르면 또 다르다. 도시로가 싸울 때 그의 손은 벌벌 떨린다. 싸움도 개싸움 하듯 볼품없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이게 희화화라고는 할 수 없다. 영화의 관습적인 표현을 뛰어넘는 리얼리즘적인 장면이다. 멋있게 쏘고 죽고 하는 게 리얼리즘이 아니라 칼을 든 손이 벌벌 떨리고 서로 품위없게 부둥켜 싸우는 게 리얼리즘이다.”

당사자에겐 절박한 것이 구경꾼에게는 코미디로 보이는 것일 뿐이라는 얘기다. 만찬장에 참석했던 이들은 생사를 걸고 다퉜지만 자신 같은 제3자가 보기엔 코미디라는 것이다. 임 감독은 코미디를 하려고 한 게 아니라 인간의 본성에 더 다가서려 했다고 말한다.

이 문제의 장면은 예고편을 본 관객뿐 아니라 실제로 촬영 내내 스탭들 또한 웃음 도가니로 밀어넣었다. 첫 테이크를 찍는데 감독부터 쿡쿡대며 웃는 바람에 NG가 났다. 임 감독은 웃음을 참을 자신이 없는 스탭들은 먼저 나가라고 말하고 다시 찍었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할 수 없었다. 장면을 다시 촬영한 뒤 모니터 앞에 앉은 임 감독. 그러나 헤드폰 속에선 또 웃음소리가 잡히는 게 아닌가. 문제의 웃음소리는 김우형 촬영감독의 것이었다. 미처 촬영감독의 웃음소리를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결국 카메라 위에 모포와 매트리스를 덮어씌워 웃음소리를 막은 다음에 촬영을 마칠 수 있었다고 한다.

“정원중(조 실장)이 화장실로 숨어들어가는 장면도 웃겨서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나는 이게 영화가 잘 찍히고 있다는 징조라고 믿는다. 코미디를 하려고 해서 그런 게 아니다. 인물의 이면을 누구나 느낄 수 있게 찍을 때 웃음이 나오는 거다.”(임상수)

한국 현대사의 돌이킬 수 없는 전환점-총격신

#4. 실내. 별관 만찬장-밤
(문 앞에서 심호흡하고 들어가는 박 부장. 심 집사와 눈이 마주친다. 노래는 끝나 있다.)
조 실장/ …탱크로 갈아버려도 충분해요. 짜식들, 쥐죽은 듯이 엎어져 있을 것들이….
박 부장/ (눈에 살기가 가득하다)
조 실장/ 자자, 진정하시고, 언니들은 이런 숭한 얘기 못 들은 거야, 알지?

이른 아침부터 양수리 종합촬영소 세트장에 집결한 스탭의 손놀림이나 눈동자에선 당일 촬영장면 못지않은 긴장감이 감돈다. 지붕 위의 조명 설치 및 조정, 그리고 각도를 달리한 카메라 두대의 운용만 해도 만만치 않은 품이 든다. 촬영 걱정으로 잠을 제대로 못 자 멜라토닌을 먹고 있는 임상수 감독은 여느 때보다 입술이 바싹 타들어간다. 10·26사태의 몸통을 다뤄야 하는 만큼 주요 배우들도 다 출연하고 총기 사용장면도 나온다. 혈액도 적지 않게 사용될 것이다. 제작부가 총기와 화약, 피를 쏟아낼 에어건과 가스통 그리고 피를 흘려보낼 고무호스를 점검한다.

송재호, 권병길, 백윤식, 정원중 등 배우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세트장에 도착했다. 양수리 촬영소의 숙소인 춘사관에 묵은 이도 있지만 대개는 매니저 없는 나 홀로 드라이브족들로, 아침 일찍 손수 운전해서 촬영장에 왔다. 그 흔한 스타크래프트 하나 보이지 않는다. 김윤아와 조은지가 등장해서야 매니저들도, 스타크래프트들도 보인다. 여느 촬영장에 가면 가장 선배급 대접을 받을 정원중, 한석규 등이 여기에선 한참 손아래다.

하나, 둘, 시∼작. 이것은 슛, 레디, 액션으로 이어지는 보통 큐사인이 아니다. 임상수 감독의 조금은 장난스럽기까지 한 시∼작 소리가 들리고 나자 이 영화의 심장부라 할 만찬장 저격신이 펼쳐진다. 만찬상 위에는 먹다 남은 음식, 태양 담뱃갑, 재떨이, 시바스 리갈을 담은 주전자가 놓여 있다. 김영삼, 데모, 미국대사관, 카터 대통령 등 정치적 안줏거리들이 올라왔다가 다 떨어질 무렵, 함께 자리에 배석한 혜선과 초대가수 금자가 흥을 돋우는 노래를 부른다. 그리고 조 실장도 끼어들어 <나그네 설움>을 부르며 분위기가 무르익는다.

파장 무렵의 만찬장, 술기운이 올랐는지 조 실장이 자신의 충성을 과시한다. “걱정마십시오, 각하! 캄보디아에서는요, 100만명이나 죽였어요. 우리두요, 한 만명만… 아니야, 천명만….” 이게 무슨 이야기인가. 그러나 이 캄보디아 정치철학 강의는 얼마 안 있어 강제로 중단된다. 조 실장은 자신의 말이 마지막 말이 될 줄 알았을까. 이 만찬이 최후의 만찬이 될 줄 알았을까. 이제 곧 해일이 들이닥칠 것이다. 임 감독은 이 장면 앞뒤로 5분간 관객은 영화의 정점이자, 한국 현대사의 돌이킬 수 없는 전환점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어느덧 점심시간, 밥차 10여대 가운데 가장 맛있다는 밥차가 도착해 식사시간을 알린다. 밥차에 제일 먼저 줄을 선 임 감독부터 스탭과 배우들이 차례로 길게 줄을 섰다. 밤샘 촬영이 될지도 모르니 든든히 먹어두어야 한다. 수많은 기구들에 전원을 넣느라 전압이 불안정해 난로도 제대로 켜지 못한다. 11월 초겨울의 추위가 실내 스튜디오에서 고스란히 느껴진다. 배우들은 수시로 분장실로 몰려들어 창살로 들어오는 따사로운 햇볕을 받으며 정담을 주고받는다. 관록 넘치는 배우들이 대거 주역으로 나서다보니 영화사는 이들의 건강을 챙기지 않을 수 없다. 젊은 배우들 하듯 강행군을 하면 탈이 나게 마련이다. 프로농구선수단의 전담 안마사를 불러 배우들의 몸을 살펴보는 것도 그 때문이다. 주전부리를 즐길 수 있도록 다양한 종류의 과자와 사탕을 복도에 챙겨두는 세심한 배려도 물론이다.

박 부장의 느닷없는 총격에 아수라장이 된 만찬장 장면을 찍으면서부터 오후의 양수리 촬영장도 숨이 가빠진다. 각하의 셔츠가 피로 물들 것을 대비, 10여장의 여벌의 셔츠도 마련했다. 난방 기구 하나 없는 썰렁한 만찬장에서 송재호는 몇번이나 셔츠를 갈아입는다. 김윤아는 촬영된 장면을 확인하느라 촬영장과 모니터 사이를 잰걸음으로 바삐 오간다. 제작부와 코디네이터들은 병풍이며 주변에 묻은 피를 닦아내고, 촬영 테이크 전후의 핏자국과 부위가 같은지를 확인하느라 분주하다. 단풍든 양수리 촬영소 앞산 너머로 일찍 해가 넘어간다.

어제의 실세, 하루 만에 국가사범으로 전락

#5. 실내. 육본 벙커 상황실. PM 8:05
(실내 체육관만한 넓은 상황실 안으로 참모총장과 박 부장, 민 대령이 들어선다. 민 대령은 구겨신은 구두를 신고도 당당하다.)
참모총장/ 국방장관 합참의장한테 연락해. 바로. 참모총장들하고, 해군 공군… 수도군단장… 빨리.
상황실장/ (다급하게 수첩에 받아 적는다.)
참모총장/ (상황실장이 넘겨준 전화를 받으며) 장관님. 급한 일이 생겼으니 바삐 원 벙커로 나오셔야 겠습니다.

공포영화를 찍은 곳이어서였을까. 정원의 꽃들은 시든 지 오래고, 이따금 박살난 유리창도 있고, 곳곳이 녹슨 폐교 안에 마련된 벙커 상황실. 영화 속 상황실은 CG의 도움을 받아 실제 규모보다 더 크게 보여질 것이다. 전체 46회차 촬영 중 44차 촬영이다. 규모가 규모인지라 세트를 만드는 스탭의 손길이 부산하다. 수십명의 대역배우를 동시에 부리느라 조감독들은 정신이 없다. 각각 다른 군복과 계급장, 모자를 맞춰주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12월 초의 쌀쌀한 날씨에 폐교 운동장에서 밥을 타먹는 보조출연자들의 행렬이 길게 늘어선다. 꼭 예비군 훈련장 같다.

촬영이 끝난 권병길, 김성욱(주 과장 운전사 역, 듀스의 김성재 동생이다) 등이 응원을 하러 나왔다. 감독 눈에 띄어 캐스팅된 제작사 명필름의 이우정 PD도 어색한 듯 중령 복장으로 갈아입고 나왔다. 백윤식을 비롯해 참모총장 역의 정종준, 김응수 등 배우들이 상황실로 들어서 리허설을 하면서 현장의 공기가 팽팽해진다. 비상사태를 알리는 정종준의 어조는 화급하고, 정종준의 일거수일투족에 모든 신경을 맞추며 급히 보고를 하고 각 요처에 연락을 취하는 상황실장(배장수, 회고전을 해도 좋을 만큼 출연작이 많은 <경향신문> 기자)의 목소리도 긴박하다.

박 부장은 궁정동에서 육군 참모총장을 이끌고 자신의 본거지인 남산으로 데려가려 하지만 여의치 않게 참모총장과 함께 육군본부로 오게 된다. 그러나 정작 육군본부 정문 앞의 초병들은 박 부장의 차를 타고 온 총장을 알아보지 못한다. 사복 차림에 남의 차를 타고 왔으니 당연한 대접이다. 이 영화와 그리고 실제 10월26일 당일엔 이런 일부러 꾸민 듯한 드라마 같은 상황이 적지 않다. 주 과장은 해병대 동기인 청와대 경호처장을 쏴야 하는 운명과 맞닥뜨리고, 참모총장은 정작 자신이 이끄는 육군본부의 초병들이 몰라봐 자신이 누군가를 한참 설명해야 하며, 보안사 사령관 출신인 박 부장은 자신이 이끌던 보안사 조사실로 끌려들어가 한참 새카만 후배에게 얻어맞아야 한다. 불과 하루 만에 벌어지는 이런 극적인 이야기는 누가 일부러 꾸미려고 해도 힘들 것이다.

박 부장은 구두도 신지 않고 급히 현장에서 나오느라 구멍난 양말 차림이다. 박 부장은 민 대령에게 급히 구두를 빌려 신고, 민 대령은 운전사 신을 뺏어신고 육군본부에 들어선다. 이런 정신없는 상황에서도 박 부장은 자신의 계획이 성공하리라고 믿었을까.

편집 박초로미·디자인 노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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