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뉴스]
[스크린 속 나의 연인] <남과 여> 아누크 에메
2005-02-01
그 여인 냄새·움직임 어느것 하나 잊지못한다
<남과 여>의 한장면

몽정을 했다. 사실 나는 그 때,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는 꿈이길 더 바랬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그 날 이후 나는 떨어지는 꿈을 꿔서 키가 훌쩍 자라길 바랬지만 그 여자(또는 그 여자를 대신하는 잔상들)가 내 꿈을 지배했고 나 또한 그 여자를 만나 속옷을 흥건히 적시곤 잠에서 깨기를 반복했을 뿐이다. 영화 제목도 생각이 나질 않는, 주말의 명화 시간에 어울리지 않는 그런 영화였던 것은 얼핏 기억이 난다. 당연히 영화 스토리는 잊은 지 오래지만 그 여자만은 너무나 또렷하게 내 마음 속에 아직도 있다.

라쿠웰 월치? 그 여자의 이름도 바른 표기법으로 쓸 줄 모르지만 그 여자가 내 열다섯 가슴에 들어올 때, 몸의 들고 나는 환상적 형태와 착 달라붙고 짧았던 그 도발적 의상들은 눈을 감고도 아직 그려낼 수 있다. 그 여자 때문에 나는 한 동안 스크린에서 여자 연기자들을 볼 때, 연기는 물론 얼굴도 채 기억하지 못하고 그저 몸만 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여자는 잔상만으로 남아있을 뿐 너무나 빨리 이별하고 말았다. 사실 그 여자 같은 역할모델들은 이후 너무나 쉽게 봐올 수 있던 터라 사랑의 미묘한 감정이 일어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주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꿈에서 등장하지 않았다, “박하사탕” 들꽃같은 여인이여…

아주 오랫동안 내 마음에 담아두었던 여인은 미처 그 이름도 모른 채였다. 아누크 에메. 나는 그 여인이 나온 영화를, 이 영화만을, 딱 한 편만 본 줄 알았다. 남과 여의 문제를 <남과 여>라는 단편적인 창을 통해 이해하는데도 충분하다고 착각하게 만든 것은 바로 그 여인 때문이었다. 요즈음 말처럼, 필이 꽂힌 채 그 여인의 모든 것을 좋아했다. 아니 그렇게 해야만 했었다. 도빌의 바닷가, 파도가 일렁이고 아이들이 분주하게 뛰는 그 회색빛 해안가의 바람처럼 그 여인의 서늘한 눈빛은 한없는 깊이를 가진 여인의 모습으로 나로 하여금 성적대상으로서 여배우와 관계를 정리하게 만들었다. 얇은 입술이 가진 관능 그리고 검은 브래지어로 이등분된 여윈 등판이 아름다운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만든 그 여인은 상당한 기간 동안 현실에서 여자친구조차 비교하게 만든 나의 절대 지배자이기도 했다.

사실 그 여인의 외모를 잘 기억해내지 못한다. 다만 그 여인의 냄새(영화인데도 말이다), 같이 있었던 카페의 소음들, 그 여인이 머리를 손가락 사이에 넣어 쓸어 올릴 때 우아한 그 움직임들을 어느 것 하나 잊지 못한다. 그 여인은 특이하게도, 아니 애타게도 내 꿈에 등장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연예인 브로마이드를 사게 했던 장본인이다. 그 여인이 나온 영화를 볼 때, 나는 미처 그 여인이 등장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오직 <남과 여>에서 그 여인만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 여인이 돌아왔다고 하기에 기쁜 마음으로 내처 달려가 봤던 <남과 여 20년 후>. 그 여인 또한 20년 후였다. 세월은 사람을 이기지 못한다. 아니 사랑하는 사람을 이기지 못한다. 그 여인은 아직도 서늘하고 깊은 고혹적인 눈빛과 아름다운 지혜를 가득 문 입술, 그리고 세월을 내려놓지 않는 시원한 이마로 여전히 사랑스러웠다.

이섭/전시기획자

나는 그 여인이 마지막이었다고 생각했었다. 최소한, 나이 들어(?) 영화 속에서 인연으로 만나는 그 따위 일들이 나에게는 일어나지 않을 거라 생각했었다. 더구나 그 여자는 처음, 너무 촌스러워서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을 그런 인상이었다. 그런데 다급하게 빠져나가는 병사들의 소란스러움과 그 여자의 나풀거리는 치맛자락의 여유로움 사이에서 그 여자는 너무나 어리숙하고 순진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문소리. 그 여자는, 엄밀하게 말하자면, 연애감정이 생기는 대상은 아니다. 솔직히 말해 달뜬 감정이 몸을 데우고 복받쳐 오르는 끓는 감정을 촉발시키지도 않는다.

그런데 묘하게도 그 여자가 왠지 내 연인이 되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게 만든다. <박하사탕>에서 설경구를 면회 온 그 여자의 청초한 들꽃 같은 모습이 현실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일까?

이섭,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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