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시대착오적인 로맨스 <키다리 아저씨>
2005-02-02
글 : 황진미 (영화칼럼니스트)
원작보다 100년 뒤진 연애담

*스포일러 있습니다.

<키다리 아저씨>는 동명의 소설로부터 많은 것을 따왔다. ‘익명의 후원자가 대학 등록금을 대주고, 졸업 뒤 작가가 된 그녀는 병상의 그를 만나 자신이 편지 내내 언급해온 연인이 바로 그였음을 안다’까지가 원작에 속한다. 영화는 여기에 한 가지 반전을 추가하는데, 메일 속 ‘짝사랑주의자’가 바로 ‘그=아저씨’이며, ‘짝사랑의 대상’이 바로 ‘자신’이라는 것. 이런 반전이 추가되고, 100년가량 시대를 늦추면 어떤 의미들이 파생될까? 남/녀주인공으로 나누어 살펴보자.

추가 반전으로 남자주인공에게 파생되는 의미, 강박신경증?

원작에서 ‘키다리 아저씨’는 고아원 공식후원자였다. 그뒤 ‘친구의 친척’으로 그녀와 친해지지만, ‘익명이며 그녀의 진실을 일방적으로 듣는 권력자’이자 ‘대면적이고 수평적이나 그녀가 진실을 털어놓지 못하는 상대’라는 모순관계 속에서 자신을 밝히지 못한다. 그러나 영화 속 그는 애초 공식후원자가 아니며, 그녀를 먼저 짝사랑하게 된 뒤 익명의 후원자 노릇을 하며 학교에 같이 다닌다. 그런데 원작처럼 절대적 권력관계로 시작된 것도 아니고, 특별한 결함도 없어 보이는 그가 왜 10년 동안이나 그녀 앞에 나타나지 못한 걸까?

메일에는 그 자신이 계급적/권력적/성차적 약자로 묘사되어 있어, 읽는 이가 화자를 ‘수강증을 빌릴 정도로 가난하고, 친구들에 둘러싸인 잘 나가는 상대를 그저 바라보는 여자’로 추측하게 한다. 그는 등록금과 그녀의 편지에 관한 사항은 누락한 채 상대보다 열등한 위치에 자신을 위치시킨다. 아니 왜? 강자의 위치에 놓이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거부하며, ‘약자의 입장에서 짝사랑하는 자신’에 도취되어 있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사랑은 반드시 거절당할 것이므로 짝사랑일 수밖에 없다고 확신하는 피해망상증자이자, 짝사랑으로 고통받는 것을 즐기는 마조히스트이다.

그러나 그는 용감한 고백 대신 숨어서 돈을 주고, 그녀의 진실된 편지를 받아왔다. 자신의 ‘인간적 약함’을 ‘경제적 강함’으로 보상받기 위함이다. 그는 약자의 자리에서 고통을 즐기면서, 강자의 자리에서 은밀히 군림한다. 그녀의 고백을 일방적으로 듣는 신적 권능의 자리에 스스로를 위치시킨 그는 과대망상증자이자, 자신을 찾아다니는 그녀의 관심과 진심을 떠보려는 사디스트이다. 분열된 나르시시스트였던 그가 기억과 더불어 과잉된 자의식을 잃고 나니, 불가능해 보이던 평등한 연애가 너무도 자연스럽게 시작된다. 멀쩡한 선남선녀 연애의 걸림돌은 다름 아닌 그의 강박신경증이었던 것. 영화가 미화하는 “말할 수 없는 사랑”의 실체가 바로 이 강박신경증이다.

100년의 시대 이동이 여주인공에게 파생되는 의미, 그리고…

발랄한 고아 소녀가 도련님의 구애를 받는다는 ‘캔디-렐라’의 원조격인 원작에는 “여자도 공민(公民)일까요?”란 물음이 나온다. 낙하산으로 발령받은 방송작가 차영미는 자신의 ‘키다리 아저씨’에 대한 사연과 (공개를 허락받지도 않은) 남의 사연을 시청자 엽서로 둔갑시켜 방송한다. 그녀는 직장에서 특별히 하사받은 집에서 공짜로 살다 밤중에 무섭다고 서브작가를 끌어들인다. 사무실에서 버젓이 선물을 배달받고 자료실 직원과는 연애 중이다(그가 아니었더라도, 서브작가에게 권하듯, 그녀는 사내연애주의자이다). 프로의식은커녕 공사의 구분도 없는 그녀를 보노라면 여자는 공적 존재가 될 수 없다는 편견이 참인가 싶다. 그녀는 모르는 이의 도움으로 대학/직장/집을 얻었으면서도, 괴이하게 여기지 않을 정도로 의존적이다. 도움의 의도와 성격이 서브작가의 우려(“늙은이가 결혼하자고 하면…”)와 비슷하게 드러나도, 늙은이가 아니라 젊은이면 괜찮다는 식이다. 원작의 매력이 독립적이고 자존심 강한 주인공에 있었다는 것을 상기하면, 영화는 100년 전으로 ‘빽도’한 셈이다.

한편 영원한 사랑을 주장하는 듯한 이 영화의 사고방식은 대단히 인스턴트식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 과거의 기억은 ‘리셋’ 버튼을 누르고, “우린 여기서 처음 만났다”고 우기면 된다나? 한번을 강하게 경험하고 과거를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성숙함이 없는 그들에게, 어쩌면 ‘기억상실’은 필연이며 고아소녀의 신산한 삶의 그림자가 말끔히 도려진 것 또한 당연한 일이다. 그들이 기억이니 운명을 운운하며 ‘쌩까는’ 짓들을 보노라면, <웃음을 찾는 사람들>의 대사 “이 얼굴을 꿈에서 본 것 같아요… 희한하네”가 떠오를 지경이다. 부디 영화의 마지막 배경음악을 음미하자. “벗이여, 꿈 깨어 내게 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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