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처럼 가늘게 웃는 외꺼풀의 애교에 <B형 남자친구>의 발랄한 소녀를 기대하고 갔더니, 실제로 만난 한지혜는 상상과는 많이 다른 사람이다. “사실 지금까지 맡아왔던 배역들은 제 자신과 너무나 상반되는 역할이에요.” 첫마디부터가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의 선입견을 향해 놓는 일침처럼 느껴진다. “저와는 많이 다른 캐릭터가 연기하기에는 더 즐거워요. 제 자신과 굉장히 다른 사람으로 받아들여진다는 게 너무 재미있고 신기하거든요.”
한지혜는 <B형 남자친구>에서 변덕스럽고 이기적인 B형 남자(이동건)에 휘둘리는 소심한 A형 여자를 연기한다. 사실 <B형 남자친구>가 한지혜의 첫 영화는 아니다. 그는 <굳세어라 금순아>에서 편의점 점원으로 스치듯 등장했고, <싱글즈>에서는 이범수의 철없는 여자친구를 연기했다. 기억하는 이는 없었다. 스타덤은 TV에서 먼저 찾아왔고, 그는 드라마 <낭랑 18세>와 <섬마을 선생님>으로 일시에 주연급 탤런트가 되었다. 1년 만에 앉아서 시나리오를 고르는 처지가 된 것이다. 이럴 땐 매니지먼트사가 점지해주는 영화를 선택하는 게 신인배우들의 익숙한 생리. 하지만 한지혜는 꼭 스스로가 선택한 영화로 시작하고 싶었다. “<B형 남자친구>는 매니지먼트사의 선택이 아니라 제 자신의 의지로 결정한 영화예요. 조건이 맞지 않아도 꼭 하고 싶다고 강하게 주장했었죠.”
물론 의지로만 넘어설 수 없는 게 첫 주연작의 부담이다. <B형 남자친구>의 촬영초반에 한지혜는 필름 카메라에 대한 공포를 느꼈다. 아무래도 익숙한 드라마 촬영과는 많이 달랐던 것이다. “잘게 끊어진 감정을 연결해야 하는 게 힘들었어요. 특히 슬레이트가 너무 싫었죠. 얼굴을 클로즈업으로 잡는 장면에서는 카메라와 얼굴 사이에서 슬레이트가 ‘탁!’ 하잖아요. 그러면 감정을 잡았다가도 ‘확!’ 하고 다시 깨어나는 거예요.” 한지혜는 창피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했다며 지난 3개월여의 촬영기간을 회고했다. “기회를 만들려고 갖은 애를 쓰는 타입은 아니에요. 하지만 한번 기회가 찾아오면 그걸 절대로 놓치지 않고 잘해내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인터뷰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B형 남자친구>의 실수연발 여대생이 슬슬 사라지고 있었다. 대신 매몰차게 신중한 신인 영화배우 하나가 또렷해진다. “저는 어려서도 지나치게 조숙했었어요. 그래서 제 나이대의 친구들이 지니고 있는 당당함이 부럽기도 했고요. 지금은 그런 생각을 뛰어넘은 지 오래고, 자연스럽게 제 또래의 연기를 하고 싶어요. 어린애가 나이든 역할을 아무리 잘한들, 세월의 진실한 흔적이 담겨 있지 않음은 피할 수가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신인배우에게 곧잘 던져질 법한 질문에도 한지혜는 당찬 포부를 성급하게 과시하지는 않았다. “영화배우로서의 이상이요? 천천히 생각해야죠. 제가 앞으로 보낼 시간과 거기에 들이게 될 노력이 제 이상을 저절로 보여줄 거예요.” 꿈꾸는 21살 신인배우에게 이상이 없을 수 있나. 가만히 앉아서 조금 더 긴 답변을 기다렸더니 “다만 저는 존재감이 큰 배우가 되고 싶어요. 이름만으로도 관객에게 신뢰감을 줄 수 있는 배우요”라고 나지막이 털어놓으며 고현정과 전도연을 언급한다. 외꺼풀의 작은 눈매가 갑자기 강렬해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