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세살 시절의 셀린느와 제시를 기억한다. 1994년, 열차에서 만난 그와 그녀, 비엔나, 철교, 두 연극배우, 전차, 진실게임, LP가게, 박물관, 묘지, 저녁 풍경, 키스와 포옹, 놀이기구, 손금쟁이, 카페, 교회, 부랑자 시인, 클럽, 길거리 공연, 식당과 전화놀이, 선상 카페, 돌계단, 포도주 한병, 풀밭, 섹스, 아침, 하프시코드, 눈으로 찍는 사진, 동상, 비엔나역, 약속과 헤어짐. 그리고 9년 뒤, 서른살을 지난 두 사람을 우린 안다. 파리, 셰익스피어 책방, 제시의 책 <이번에는>, 주름지고 마른 얼굴의 그, 모든 삶은 드라마다, 만남과 인연, 재회, 아름다운 미소의 그녀, 환경단체에서 일하는 셀린느, 거리의 악사, 9년 전 약속, 골목, 카페, 담배, 현실 속 이상주의자, 산책, 그날 우리가 섹스를 했던가, 공원, 벤치, 제시의 결혼, 센강, 유람선, 노틀담성당, 책을 쓴 이유, 차 안에서의 고백, 꿈, 포옹, 고양이 ‘체’, 그녀의 집, 셀린느의 왈츠, 니나 시몬, 그녀의 춤과 몸짓, 그의 시선.
<비포 선라이즈>와 <비포 선셋>은 사랑의 시작이다. 그래서 행복할수록 아쉬운 시간은 미련을 남긴다. <비포 선라이즈>와 <비포 선셋>은 열려진 미래에의 약속이다. 약속이 이루어질까 궁금했던 만큼 다시 만난 둘의 미래가 궁금하다. <비포 선라이즈>와 <비포 선셋>은 감독과 두 배우가 만드는 ‘길의 노래’다. 영화를 만드는 과정이 그대로 이야기로 구성되고, 감독과 두 배우의 생각은 두 주인공의 입을 통해 흘러나온다. <비포 선라이즈>와 <비포 선셋>은 프랑수아 트뤼포보다 에릭 로메르에 가까운 사랑 이야기다(기차에서 눈빛을 나누는 첫 장면은 <훌륭한 결혼>(1982)의 마지막과 닮았다). 바람처럼 스치는 우연의 영롱함이여.
그간 DVD 제작에도 정성을 기울였던 리처드 링클레이터를 안다면 <비포 선라이즈>와 <비포 선셋> DVD에 별다른 부록이 없음에 실망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먼저, 위에 적힌 장소와 속삭임들을 하나씩 기억해보라. 그들의 작은 손짓과 눈빛 그리고 대화에 모든 것이 담겨 있는데, 더이상 무엇을 듣고 싶을까, 보고 싶을까. 두편 DVD의 담백한 외양은 사랑스러울 정도로 작은 영화에 대한 예의이자 감독의 배려란 생각이다. <비포 선셋>에 담긴 10분짜리 메이킹 필름의 모습이 영화 본편과 그리 다르지 않다는 게 그 증거다. 비엔나와 파리를 배경으로 만들어진 깔끔하고 뽀얀 각각의 영상이 주는 만족감에 비해 소리는 아쉽다. 캐스 블룸과 줄리 델피의 노래가 주는 감동이 여전하다고 해도 그 공간의 소리를 모두 듣고 싶은걸 어찌하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