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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의 적2>의 ‘정의’가 위험한 3가지 이유
2005-02-07
글 : 황진미 (영화칼럼니스트)
내셔널리즘 권하는 영화

<공공의 적2>는 <씨네21> 488호 특집기사가 말하듯 ‘정치영화’이다. 강우석 감독은 이 영화를 “내 생각이 그대로 대사로 드러나는,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담은 영화”라 공공연히 밝히고 있으며, 이 영화의 취지는 “공공의 적에 대해 관객이 함께 분노하는 계기를 마련하는 것”이라 덧붙인다. 문자 그대로 이 영화는 ‘공공의 적’을 전시하고, 적에 대한 ‘공분’(公憤)을 통해 관객의 일체감을 높이고자 만든 일종의 정치선동영화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가 선동하고자 하는 정치성이 무엇인지가 관건이다. 즉 그가 효수(梟首)한 공공의 적은 어떤 적대성을 지니며, 그를 단죄하는 논리는 무엇인지, 그리고 그를 처단하는 과정을 통해 관객에게 불러일으키려는 일체감은 무엇인지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위 문제들을 살피면서 이 영화의 이데올로기와 그 효과에 대해 논해보겠다.

이유 1. 서민이나 국민이 아니면 ‘공공의 적’?

‘전편이 패륜아에 대한 분노였다면 후편은 사학재단비리와 정경유착으로까지 사회적 공분의 규모를 확장하여 한국사회의 구조악을 법의 이름으로 심판한다’(이종도, <씨네21> 488호)는 지적은 피상적으로만 옳다. 가족살해와 이유없는 약자살해는 전·후편의 공통사안이나, 단지 차이점은 ‘악함’이 전편에서는 훨씬 개인에 결부되어 있고, 후편에서는 계급에 결부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후편의 그가 자본가 계급을 대표하거나, 사학재단비리나 정경유착을 대표하지는 않는다. 영화는 “좋은 부자를 존경하도록, 너 같은 놈을…”이라는 말로, 그가 나쁜 부자의 표상일 뿐, 자본가 계급일반을 표상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또한 사학재단 일반에 대해 비판을 가하는 것도 아닌데, 안 이사에 의해 눈물겹게 회고되듯 ‘사학의 길’은 분명 ‘명예로운 사도의 길’이며, 그토록 신성한 재단을 계속 운영치 않고 매각하는 것이 나쁜 일이라는 것이다. 즉 사학재단의 운영 자체에 비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사학재단을 팔아치우는 것이 비리’라는 것이므로, 이 영화는 TV 보도물이나 <두사부일체>보다도 사학재단비리를 건드리지 않는다. 그렇다면 정경유착의 핵심을 건드리고 있나? 사건은 수년 전부터 무수히 터져나왔던 ‘*** 게이트’, ‘@@@ 리스트’의 하나일 텐데, 뇌물수수는 다반사이며, 대가성 여부도 불분명하고, 둘간의 연대도 공고하지 않다. 무엇보다도 그들의 결합이 개인 대 개인의 연줄일 뿐 ‘재벌과 정부’간의 구조적인 정경유착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가 왜 ‘공공의 적’이어야만 하는가?

감독이 그에게 부여한 가증스러움의 핵심은 스스로를 귀족이라 생각하는 미국 시민권자가 사학재단을 팔아서 외국으로 뜨려 한다는 것이다. 즉 그의 죄상은 첫째, 귀족의식을 갖고 있으며(‘루이 윌리암~스 세바스천 주니어 3세’의 대사, “천한 것들!”이 자주 인용된다), 둘째, 미국 시민권자로 ‘국부’를 유출하려는 것(국민경제의 적)이다. 그가 ‘서민’이 아니고, ‘국민’이 아니라는 사실이 공분을 자아낸다는 것이다.

이유 2. 민족주의자 검사 강철중이 인민의 벗?

강철중은 의협심으로 패싸움에 나섰다가 단체기합을 받으면서 세상을 알았다고 회고한다. 패싸움의 군중심리와 단체기합의 폭압성에 대해서는 무감각하며, 그는 오직 평등치 않음에 분노한다. 그는 ‘전체주의’ 속에서 ‘평등주의’와 ‘힘(!)’을 갈망하여 검사가 된다. 그는 검찰의 임무를 ‘나쁜 놈들 잡는 것’이라 굳게 믿는다. 그는 법과 정의를 동일시한다. 아니 법보다 정의를 갈망하여, 법을 어겨서라도 정의를 수행코자 하는데, 그의 정의는 결국 검찰에 의해 법의 지지를 받는다. 법을 벗어나지만 법으로 완수되며, 결국 법은 정의를 싸안는다.

전작의 강철중은 단순무식 과격하지만 적어도 인륜이 뭔지는 아는 정도의 도덕을 지닌 자였다. 그는 정의를 내세운 바 없고, 끝까지 그의 모든 행동이 법으로 비호되지도 않는다. 법과 정의에서 벗어난 최소한의 도덕의 지점에서, 강철중의 육체성이 발화하는 삐딱하고 친숙한 체취가 전작의 매력이었다. 그러나 후편에서 그의 육체는 개인성을 탈각하고, 검찰이라는 기관의 몸으로 탈바꿈한다. 그는 국가기관의 현신(現身)으로서 정의를 구현하는데, 그런 그가 “메리, 마이클, 제임스에게 그 돈이 들어가…, 그 돈이면 결식아동…”이라며 분개하고, 심지어 “월드컵 때 너무 좋아서 빤쓰만 입고 뛰어다녔다”며 소리친다. 실로 내셔널리즘의 극한이다.

한편 “발포하라, 난… 내 사람 다치게 안 한다”며 충성의 사열을 받으며, 아랫사람의 가족을 챙기는 의리는 또 어떠하며, 부자 후배에게 밥 얻어먹고, 청렴한 검사가 되기 위해 결혼도 포기하고, 오밤중에 라면 냄비 박박 긁는 그의 서민성은 또 어떠한가? 강철중의 이미지는 민족주의와 군인정신, 평등주의와 서민정서가 결합된 ‘누군가’를 떠올리게 한다. 그것이 박정희이든 아니든, 대중민주주의 시대에 대중의 동일시를 통해 동의를 얻어내고자 하는 ‘대중독재의 지도자상’에 완벽하게 수렴된다. 대의민주주의의 절차를 무시하고 직접민주주의의 열망을 불태우는 그들은 법 절차보다는 정의를 확신하는 강철중과 닮아 있으며, 그들이 정권을 잡고 나면 가장 먼저 ‘정의사회구현’을 기치로 부패정치인과 깡패를 일소하는 것 역시 강철중의 역할과 유사하다.

이유 3. 국가가 정의고, 국민/서민은 선(善)?

강철중이 홍길동이나 장총찬(<인간시장>의 주인공) 같은 야인이 아니라 국가기관의 현신이라는 사실은 현실정치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기묘한 영웅담이 검찰의 제복을 입고 출현할 수 있는 것은 검찰로 대변되는 국가권력에 대한 거부감이 ‘이제는’ 희박해졌다는 감독의 정치인식에 기인한 것인데, 이는 (어느 정도 사실일 수도 있겠지만) 참여정부의 강금실 전 법무부 장관을 통한 이미지 메이킹의 결과이자, ‘국민이 대통령’이라는 슬로건으로 대변되는 현 정권의 이데올로기이다. 즉 오랫동안 국가가 충성의 대상이자 투쟁의 대상이었지만, “참여정부에 이르러 국가의 성격이 달라졌으며, 따라서 국가가 정의의 담지체가 될 수 있다”는 정치적 신념은 근대 이후 경주되었던 ‘국민국가 만들기’의 기획이 드디어 완수되어, 진정한 의미의 국민주권시대가 왔다는 선포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이 신념은 사실 진위여부를 떠나 심각한 문제를 지닌다. (아무리 올바른 국가라 할지라도) 국가가 ‘정의’의 내용을 결정하고 집행할 때, ‘정의’가 무엇인지 논의되는 공적영역으로서의 시민사회는 축소되며, 사회의 구성원들은 자율적 시민이 아니라 타율적 국민으로 끊임없이 소환된다. 또한 ‘국민’ 혹은 ‘서민’이 아닌 자를 ‘공공의 적’으로 명명하는 순간, 공공성(公共性) 혹은 공공선(公共善)의 문제가 고작 ‘국민-되기’, ‘서민-되기’의 문제로 왜곡된다. 국민/서민은 선(善)한가? 국가는 정의를, 국민/서민은 선(善)을 담지한다는 이 신념이 바로 국가주의와 포퓰리즘의 모토이다.

<공공의 적>에서 강철중의 육체성 속에 은근히 보여지던 포퓰리즘과 <실미도>에서 국가에 의해 살아지고 사라졌던 그들의 존재로 증명되던 국가주의가 <공공의 적2>에서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어 합창된다. 가장 우려되는 것은 강철중으로 표상되는 ‘대중과 정서적으로 동일시되며, 대중에 의해 위임된 강력한 국가권력’이 곧 정의를 실현할 것이라고 믿는 대중독재의 그림자이다. 또한 관객이 공론장을 국가주의와 포퓰리즘으로 도색하는 진정한 ‘공공의 적’을 알아보지 못할까 염려스럽다.

일러스트레이션 김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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