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뉴스]
한국 최초 영화 <아리랑> 원본필름 발견되나
2005-02-12
'전설적' 영상수집가 아베 사망
영화 <아리랑>의 출연배우 및 제작진. 아래쪽 가운데 아이를 안고 앉아 있는 이가 나운규다. <한겨레> 자료사진

전설적인 영상수집가로 불려온 한 일본인의 죽음이 영화인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고 있다. 그가 소장해온 것으로 전해진 춘사 나운규의 걸작 <아리랑>이 햇볕을 볼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 때문이다.

일제 시대와 전후의 귀중한 영상들을 수집해 보관해온 오사카의 영상수집가 아베 요시시게(81)가 9일 지병으로 숨졌다. 그는 생전에 5만점이나 되는 소장 필름에 대한 전문가 조사나 접근을 완강하게 거부해 많은 영화인들을 안타깝게 했다. 그러나 그가 상속인 없이 사망함에 따라 이 필름들은 법적 절차를 거쳐 일본 문화청의 소유로 넘어가게 됐다. 문화청은 곧 도쿄국립근대미술관 필름센터를 통해 본격 조사를 벌일 예정이다.

최대의 관심사는 그의 소장 필름 가운데 <아리랑>의 원본이 있느냐 하는 점이다. 일제 식민지 치하 우리 민족의 한을 담은 ‘문화유산’인 이 필름은 한국전쟁 때 불타 없어진 것으로 전해졌으나, 1970년대부터 아베가 갖고 있다는 얘기들이 널리 퍼졌다. 아베가 직접 영상을 보고 작성했다는 소장목록의 동양영화 55번째 항목에 ‘아리랑/9권/현대극’이라는 제목이 있지만 필름은 확인되지 않았다고 마이니치신문이 11일 보도했다. 아베는 조선총독부의 경찰의사였던 아버지 대부터 필름을 수집해왔다.

남북한 영화 관계자들은 <아리랑>의 필름을 얻기 위해 경쟁을 벌였으며, 영화를 좋아하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도 관심을 보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북쪽에선 재일본조선인총연합(총련) 영화제작소 소장이었던 여운각씨, 남쪽에선 다큐멘터리 작가 정수웅씨가 영상편집기기 등의 선물을 들고 찾아가 아베를 설득하느라 안간힘을 쏟았으나 거절당했다. 아베는 “<아리랑>은 식민지 시대의 반일영화인 만큼 일본인으로서는 생각할 부분이 있다”며 “그렇다고 내놓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남북이 통일되면 평화를 위해 내놓겠다”고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지난해 말 병상에 누운 아베를 문병갔던 여씨와 정씨는 원본이 발견되면 복사해 남북이 하나씩 가질 수 있기를 기대했다.

일본 문화청 관계자는 “필요하다면 한국의 전문가에게도 협력을 요청해 조사하겠다”며 “(이 영화가) 한국 영화의 뿌리인 만큼 발견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일본의 한 영화평론가는 한국전쟁 때 없어진 다른 많은 필름들도 발견될지 모른다며, 한국 영화사 연구의 공백기를 채워줄 수 있을 것이라는 바람을 나타냈다.

요절한 한국 영화의 선구자 나운규가 1926년 각본·감독·주연을 도맡아 제작한 무성영화인 <아리랑>은 3·1운동에 가담했다가 일제의 고문으로 미치광이가 된 대학생이 귀향한 뒤, 동네 사람들을 괴롭히는 악덕지주이자 일본 경찰의 앞잡이를 낫으로 죽이고 잡혀가는 내용이다. 그가 오랏줄에 묶여 아리랑고개를 넘어가는 마지막 장면에 울려 퍼지는 아리랑 노래는 압제에 시달리던 조선인들에게 진한 감동을 안겨줬다.

도쿄/박중언 특파원 park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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