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운규 감독의 1926년작 <아리랑>의 필름을 보관하고 있다고 전해진 일본의 아베 요시시게(81)가 지난 11일 세상을 떠남( 한겨레신문 12일치 참조)에 따라 이 필름을 찾을 수 있을지에 영화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그러나 이 궁금증에 매달리기 전에 먼저 건너가야 할 다리들이 많다. 우선 필름이 과연 있느냐가 확인되지 않고 있는데다 아베라는 인물이 의문에 쌓여있기 때문이다.
아베가 <아리랑> 필름을 갖고 있다는 말은 90년대초를 전후해 한국에 퍼지기 시작했다. 그 말을 듣고 1992년 당시 영상자료원장이었던 호현찬(79) 전 영화진흥공사 사장이 직접 아베를 만나기 위해 일본을 찾아갔다. 호씨의 회고를 들어보면 아베에 대한 의문은 더 커진다.
아베는 사람을 잘 만나지 않고 은둔하듯 사는 인물이었다. 오사카 근교 이시키리역 주변의 한 산 기슭에 창고처럼 붙어있는 아베의 집은 한쪽 지붕이 기울었고 입구도 찾기가 힘들었다. 그때까지 전해진 말로는 아베의 아버지가 일제시대에 일본 경찰청 촉탁의사로 한국에 근무하면서 필름을 사모았다고 했다. 호씨가 이 말을 건넸더니 아베에게선 다른 답이 나왔다.
아베는 “아버지가 한국에 있은 게 3년인데 어떻게 그 많은 필름을 모았겠냐”면서 “폭탄을 만들기 위해 한국과 만주, 대만에서 필름을 모았다가 전쟁이 끝나 그것들을 가지고 있게 됐다”고 호씨에게 말했다. 당시 필름엔 질산염이 들어있어 폭탄 연구에 쓰인다는 게 영 틀리는 말은 아니었다. 아베는 그렇게 모은 게 일부 일본 필름을 포함해 5만권(1권은 필름 한통으로, 장편영화 한편이 5~9권이다)이며 자기 집과, 다른 두곳에 분산돼 보관돼 있다고 했다. 자기 경력과 관련해 아베는 교토 의학전문학교를 중퇴했으며 일제시대에 군대에 나가지 않았다는 말을 약간 자랑스럽게 했다.
오사카근교 산기슭 은둔생활, 그가 보여준 목록엔 아리랑외에 25년작 <암광> 등 한국영화 상당수
<아리랑>을 가지고 있냐는 호씨의 질문에 아베는 “정리를 안 해서 모르겠는데 하면 나오지 않겠냐”며 십여년전 쯤에 정리해놓은 듯한 한국 영화 필름 목록을 호씨에게 보여줬다. 목록을 본 호씨의 눈이 번쩍 띄였다. 60여편의 목록엔 <아리랑>뿐 아니라 1925년작 <암광>부터 32년작 <임자없는 나룻배> 등 당시 한국영화 대표작들이 망라돼 있는 데 더해, 발표되지 않아 제목을 처음 보는 30~40년대 영화도 상당수 들어있었다.(이 목록에 담긴 영화 가운데 지금 한국에 있는 건, 최근 영상자료원이 중국에서 구해온 <군용열차> 한편 밖에 없다.) 아베는 필름들이 정리가 안 돼 보여주기 힘들며 정리가 되는 대로 남한과 북한에 공평하게 돌려줄 것이라고 했다. 필름 반환엔 아무런 대가도 필요 없으며, 자신은 상속자가 없기 때문에 죽으면 일본 정부가 그 일을 하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같은 해인 92년에 호씨는 아베가 한국에 보낸 필름 한통을 받았다. 30년대 후반작으로 추정되는 <인인애(隣人愛)>라는 10분짜리 무성영화였다. 동봉된 아베의 편지엔 “같은 필름을 북한에도 보냈으며 조만간 <모자초(母子草)>라는 필름도 보내주겠다”고 적혀있었으나 다음 필름은 받지 못했다. 이후로 한국의 언론사, 방송국, 영화인들이 여러차례 <아리랑>을 찾아 아베와 접촉을 시도했으나 성과를 보지 못했다.
여기서 추리를 하자면 끝도 없다. 우선 필름 5만권은 전세계 필름 아카이브를 통틀어도 최대 규모에 가까우며 개인의 힘으로 이걸 모으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데, 그렇다면 당시에 상당한 힘을 가진 기관에서 필름을 모았다는 추정이 가능해진다. 아베는 결국 이들 필름의 소유자이기보다 ‘침묵의 관리자’였을지 모른다고 생각해볼 수 있으나, 지금으로서는 추리에 불과하다.
문화관광부는 현재 일본 문화청과 접촉하면서 수시로 이 문제에 대한 정보를 확인하고 있다. 김태훈 영상산업진흥과장은 “아베의 조카가 나타났다는 말이 있어 확인중”이라며 “상속권이 어디에 귀속되는지, 진품이 있는지를 먼저 확인하고, 있다면 일본 문화청에 요청해서 반드시 한국으로 돌아오도록 협상에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