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뉴스]
[스크린 속 나의 연인] <플레이어> 팀 로빈스
2005-02-15
글 : 조선희 (한국영상자료원장)
내 친구랑 닮았다, 단순한 외모치곤 하는 짓이란

10대를 마칠 때까지 내가 본 영화들 속에 연인 같은 건 없었다. 나는 여학생이되 여성은 아니었다. 내 10대를 통틀어 가장 인상적이었던 영화가 <엑소시스트>인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 영화를 본 건 중학교 2학년 때였는데, ‘전 교사의 지도주임화’가 이루어진 학교인데다 시내에 극장이라곤 두 군데뿐이니, 사복으로 위장했다 해도 영화관람이란 남의 집 담을 타넘는 것만큼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린다 블레어가 괴성을 지르고 얼굴이 칼자국으로 너덜너덜해지고 입에서 퍼런 똥 같은 물질이 꾸역꾸역 밀려나오는 걸 눈을 반쯤 가린 채 겁에 질려 지켜보았는데, 주인공 소녀의 정신분열과 인체학대에 감정이입할 때 분출하던 아드레날린이야말로 우리의 제도교육 스트레스에 출구가 될 자격이 있었다.

한때 크리스 미첨과 올리비아 허시가 나오는 <썸머타임 킬러>가 유행했고 두 청춘스타에 대해 떠들지 않으면 대화에 낄 수 없던 시절이 있었다. 나도 대세를 좇아 이 영화를 보았지만 어찌된 일인지 폭력이나 섹스 장면은 전혀 기억나지 않고 오직 하나, 두 남녀가 손을 잡고 조그만 배를 타는 장면 하나가 달랑 기억에 남아있다. 베드신은 아니더라도 키스신 정도는 있었을 텐데 당시 우리 처지에서 <엑소시스트>에 비하면 그건 너무나 설득력 없는 판타지였다. 대학 1학년 때 농촌활동을 다녀온 뒤 심신의 피로가 생리현상의 부조화를 가져왔던 모양인데 남학생들과 큰 교실에서 함께 ‘잔’ 탓에 임신이 됐을지 모른다고 걱정했으니, 그런 정서적 성적 지진아가 영화에서 베드신을 보았다 해도 그게 에로틱하거나 로맨틱했을 리 없는 것이다.

에로틱하거나 로맨틱 하진않다, 고집세고 쿨하고 똑똑하다

내가 스크린에서 어떤 남성의 매혹에 잠시 넋을 놓은 건 로버트 알트만의 92년작 <플레이어>였다. 영화 찍고 싶다고 시나리오를 들고 찾아오는 감독들에게 늘 “스무단어로 설명해봐.”라고 말하는 ‘싸가지 없는’ 할리우드 영화제작자가 나오는데 내가 ‘이 배우의 다른 작품도 보고 싶다’는 마음에 설레어 보기는 처음이었다. 그가 팀 로빈스다. 이 배우가 초면은 아니었다. 에드리언 라인 감독의 90년작 <야곱의 사다리>에서 그를 처음 봤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음산하고 끔찍한 장면들이 계속되는 가운데 뒤숭숭한 표정으로 나오는 이 배우와 개인적으로 어떤 소통을 하기엔 감독의 장력이 너무 셌다. 게다가 관객의 뒷통수를 후려치는 결말의 충격은 주연 배우의 조금은 독특했던 첫인상까지도 쓰나미처럼 다 쓸고 가버렸다.

소설가 조선희

그는 유난히 큰 키에 미남이긴 하나 역대 할리우드 남자스타들처럼 ‘에로틱’하거나 ‘로맨틱’하진 않다. 그보단 오히려 고집 센 지식인 같은 분위기, 똑똑하고 냉소적이면서 쿨한 이미지가 있다. 혹시 웃을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는 고종석이라는 친구하고 이목구비가 닮았다. 하는 짓을 보면 그의 이미지가 단순한 외모만은 아닌 것 같다. 보수 우파의 정치행태를 조롱한 <밥 로버츠>나 사형제도를 비판한 <데드맨 워킹>을 감독한 것도 그렇지만, 9살 연상의 선배 여배우와 결혼하고, 어느 핸가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아이티난민에 대한 정책을 비판해 소란을 일으키고, 지지난 대통령선거에선 랄프 네이더를 적극 지지해서 고어를 떨어뜨린 주범이라고 민주당지지자들한테 손가락질 당한 것도 그렇다.

1994년 칸영화제에 갔는데 그해의 개막작이 <허드서커 대리인>이었다. 순진하고 낙천적인 주인공이 냉혹한 자본주의의 시험에 들어 고난을 치르는데, 나는 이 영화에서의 팀 로빈스를 특히 좋아했다. 칸 개막식 때 대극장 앞에서 자동카메라를 들고 서있다가 붉은 카펫의 계단을 걸어 올라오는 스타들 가운데서 까만 싱글 정장의 팀 로빈스를 발견하고 셔터를 눌렀다. 가까이서 보니 이 남자는 두 다리가 참으로 긴 것이 마치 영덕대게 같았다. 나는 영화제 자료와 함께 필름 두 롤을 신문사로 우송했는데 나중에 돌아와서 보니 신문에 실린 사진 몇 컷만 남고 나머지 필름은 찾을 수 없었다. 나의 영덕대게 역시 흔적 없이 사라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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