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2004 Final Cut [1] - 세계의 영화지들이 뽑은 2004년 베스트 10 ①
2005-02-15
정리 : 박은영
2004, 그들의 선택

2004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음력 설을 맞은 한국 이야기가 아니다. 미국, 영국, 프랑스, 그리고 일본의 대표 영화지에서는 얼마 전 2004년 결산을 내놓았거나, 심지어 지금도 작업 중이다. 이들을 재촉해 2004년의 결산 보고서를 받아들었다. 나라별로, 매체별로 어떤 작품들을 2004년 최고의 영화로 꼽았는지 비교해보는 재미는 솔솔하다. 우리가 보았거나, 놓쳤거나, 기다리고 있거나, 듣도 보도 못했던 영화들이 그들 성적표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미국의 <필름 코멘트> <빌리지 보이스> <엔터테인먼트 위클리> <타임> <뉴욕타임스>, 영국의 <가디언>, 프랑스의 <카이에 뒤 시네마>, 일본의 <키네마준보>가 선정한 2004년의 영화들은 매체와 개인별로 뚜렷한 차이를 보이면서도, 미국 인디계의 중진과 거장들의 활약,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영화의 선전, 다큐멘터리의 르네상스 등 2004년 세계 영화계의 사건들로 갈음할 만한 특징들을 공유하고 있다. 천천히 뜯어보면 더 재밌는 2004년의 ‘진짜진짜’ 마지막 보고서를, 지금 여기에 공개한다. 편집자


<사이드웨이>의 길을 지지한다

<필름 코멘트>베스트10

<카페 뤼미에르>

<필름 코멘트>의 필자들은 2004년 최고의 영화로 알렉산더 페인의 <사이드웨이>를 꼽았다. 알렉산더 페인의 영화세계가 “잘 숙성된 와인처럼 깊어졌다”는 것이 그들의 중평. “페인 특유의 염세주의적 캐릭터가 이제 진실의 문을 열어젖힐 태세”라면서, 긍정적이고 현실적인 변화를 보인 것을 반색하고 공감하는 분위기다. 인디영화(혹은 그 정신을 계승한 영화)를 응원하고 지지하는 경향을 보여온 <필름 코멘트>는 미셸 공드리와 찰리 카우프만의 합작품 <이터널 선샤인>에도 높은 점수를 매겨, 2위에 랭크시켰다.

아직 미국 개봉관에 소개되지는 않았지만, 뉴욕영화제나 칸영화제 등의 해외영화제에서 ‘발견’한 미개봉작 중에선 허우샤오시엔의 <카페 뤼미에르>를 첫손에 꼽았다. <카페 뤼미에르>에 대해서는, 2003년 12월 도쿄에서 열린 오즈 탄생 100주년 기념 영화제에서 첫선을 보이던 시점부터 특별한 기대와 관심을 보여왔으니, 1위 등극은 자연스러운 결과인 듯하다. 이 밖에도 지아장커의 <세계>와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열대병>에 높은 만족을 보였고, 루크레치아 마르텔(<성스런 소녀>)과 리산드로 알론소(<죽은 사람들>) 등 라틴 영화계의 신성도 주목해주었다.

2004년의 ‘중요한 영화들’ 목록에서 가장 먼저 언급된 영화는 마이클 무어의 <화씨 9/11>이다. <필름 코멘트>는 지난 5, 6월호에서 <화씨 9/11>을 “올해의 영화”로 단정하고도, 2004년 결산 톱 10에 넣지 않은 이유를 “대선 뒤에 완전히 다른 영화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해명하고 있다. 영화가 처음 공개됐을 때 현실적 파장과 영향력을 기대했지만, 결과는 그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는 것. “할로윈 선거 이후 우울해진 이 땅에서, 피하고 싶은 영화가 되었다”는 것이 의기소침해진 그들의 결론이다. 세네갈의 노장 우스만 셈벤의 <무라드>, 영국 마이크 리의 <베라 드레이크>처럼 “여성에게 자기 몸의 주인이 돼라고 촉구하는 페미니스트영화들”도 주목했고, 대담하고 노골적인 퍼펫애니메이션 <팀 아메리카: 국제경찰>과 반유대주의 논란을 불러일으킨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도 요란하게 왔다 갔지만 ‘잊어선 안 될 올해의 영화들’로 언급했다.

편집자와 필자들이 뽑은 베스트10

개봉작

1 사이드웨이(알렉산더 페인)
2 이터널 선샤인(미셸 공드리)
3 비포 선셋(리처드 링클레이터)
4 밀리언 달러 베이비(클린트 이스트우드)
5 안녕, 용문객잔(차이밍량)
6 우리의 음악(장 뤽 고다르)
7 베라 드레이크(마이크 리)
8 킬 빌2 (쿠엔틴 타란티노)
9 도그빌(라스 폰 트리에)
10 무라드(우스만 셈벤)

미개봉작

1 카페 뤼미에르(허우샤오시엔)
2 세계(지아장커)
3 성스런 소녀(루크레치아 마르텔)
4 열대병(아핏차퐁 위라세타쿤)
5 왕과 왕비(아르노 데플레생)
6 킨(로지 케리건)
7 삼중 간첩(에릭 로메르)
8 10호 법정, 심리의 순간들(레이몽 드파르동)
9 2046(왕가위)
10 죽은 사람들(리산드로 알론소)



링클레이터에게 영광있으라

<빌리지 보이스>의 베스트10

<비포 선셋>

2004년 <빌리지 보이스>의 선택은 <비포 선셋>이다. 설문에 응한 94명의 평론가 중 49명이 2004년의 영화로 <비포 선셋>을 언급했고, 최고의 감독으로도 마틴 스코시즈(<에비에이터>)를 제치고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손을 들었다. 2위는 미셸 공드리가 연출한 사랑의 미스터리극 <이터널 선샤인>이 차지했다. 대표 평론가 짐 호버먼은 최상위권에 오른 이들 두 영화가 ‘프랑스 혈통’을 지녔다는 점에 주목한다. “정치적으로 불행했던 한해, 우리는 프랑스풍의 낭만적인 ‘아메린디’(아메리칸 인디) 영화에 마음을 빼앗겼다. <비포 선셋>은 흘러가는 테이크와 리얼 타임의 구성이고, <이터널 선샤인>은 들쭉날쭉한 편집과 분절된 시간 구성이지만, 둘 다 프랑스 혈통이다. <비포 선셋>은 프랑스 파리가 배경이면서 에릭 로메르의 영화를 연상시키는 인물들이 등장하고, <이터널 선샤인>은 감독이 프랑스인일 뿐 아니라 알랭 레네의 <사랑해 사랑해>에서 얻은 영감을 전제로 깔고 들어간다.”

정치적, 사회적 현실 도피의 열망으로 ‘파리의 낭만’을 지향했다지만, 그렇다고 역사와 현실에 대해 발언한 영화를 외면한 건 아니다. 많은 이들의 지지를 얻지는 못했지만, 일부의 열렬한 지지를 받아 3위에 올랐다는 <도그빌>이 ‘시대 정신’의 흔적. 개인적인 초이스에도 <도그빌>을 2위로 꼽은 짐 호버먼은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의 흥건한 피가 <화씨 9/11>의 분노를 덮어 끈 반면, <도그빌>은 두 영화의 선동가들보다 덜 의식적으로 그러나 더 효과적으로 발언했다”고 칭찬했다. 짐 호버먼은 2004년 최고의 영화로도 미국 근현대사를 다룬 380분짜리 다큐멘터리 <소멸하는 별빛>을 선정, “방대하고 역설적인 미국의 20세기 역사를 독특하고 놀라운 기법으로 표현한, 진정한 언더그라운드 영화”라고 평하고 있다.

한편 한국영화의 선전도 눈에 띈다. 최근 <빌리지 보이스>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평론가 마이클 앳킨슨의 초이스에는 <오아시스>가 3위라는 높은 순위에 올라 있고, 전체 평론가들의 선택에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이 32위에 올라 있다.

94명 평론가의 선택

1 비포 선셋(리처드 링클레이터)
2 이터널 선샤인(미셸 공드리)
3 도그빌(라스 폰 트리에)
4 사이드웨이(알렉산더 페인)
5 안녕, 용문객잔(차이밍량)
6 우리의 음악(장 뤽 고다르)
7 크림슨 골드(자파르 파나히)
8 아이 러브 하커비(데이비드 O. 러셀)
9 베라 드레이크(마이크 리)
10 무라드(우스만 셈벤)

짐 호버먼

1 소멸하는 별빛(켄 제이콥스)
2 도그빌(라스 폰 트리에)
3 우리의 음악(장 뤽 고다르)
4 겁쟁이는 무릎을 꿇는다(가이 매딘)
5 이터널 선샤인(미셸 공드리)
6 비포 선셋(리처드 링클레이터)
7 작은 마을의 봄(티엔주앙주앙)
8 안녕, 용문객잔(차이밍량)
9 이노센스(오시이 마모루)
10 지옥의 해부(카트린 브레이야)

최고의 감독: 리처드 링클레이터(비포 선셋)
최고의 연기: 이멜다 스턴튼(베라 드레이크)



만장일치, <사이드웨이>

<엔터테인먼트 위클리>의 베스트10

<사이드웨이>

<엔터테인먼트 위클리>의 두 평론가 리사 슈워츠봄과 오언 글라이버먼이 모처럼 ‘투 섬스 업’을 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사이드웨이>를 지지했는데, 같은 영화를 ‘베스트’로 꼽은 건 9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 정치적 문화적으로 사건사고가 많았고, 그런 이슈를 반영하는 문제적 영화도 유난히 많았던 해에, 이렇듯 작고 소박한 영화에 평론가들이 열광한 데는 이유가 있다고(주인공 폴 지아메티의 평론가스러운 외모 때문만은 아니라고), 이들은 입을 모았다. 리사 슈워츠봄은 “여행을 가고, 와인을 마시고, 집으로 돌아와, 변화의 첫발을 떼는 남자들 이야기로, 어렵지 않고 인간적일 뿐 아니라, 겸허하고 온정적인 영화”라고, <사이드웨이>의 미덕을 상찬하고, 오언 글라이버먼은 “인간적이고 유쾌하고, 무엇보다 직설화법이 매력적인 영화로, 정밀하면서도 유머와 품위가 있는 연출 솜씨는 할리우드 황금기의 풍부하면서도 어렵지 않은 영화들을 연상시킨다”고 전했다.

이들이 두 번째로 꼽은 영화는 각각 <밀리언 달러 베이비>와 <이터널 선샤인>. 리사 슈워츠봄은 “사랑, 우정, 가족, 선택, 신념, 모순의 이야기로 직격탄을 날리는” <밀리언 달러 베이비>를 2위로 꼽으며 연출과 출연과 음악을 겸한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결코 다른 감독들이 넘볼 수 없는 경지에 올랐다고 단언한다. 오언 글라이버먼은 <이터널 선샤인>의 역순 구성의 미덕이 로맨스의 실패라는 주제와, 이성적으로 감성적으로 잘 조응한다고 평한다. “관계의 끝에서 시작돼 처음으로 되돌리며, 사랑의 추억을 되짚는 구성은 탁월하다. 이렇게 머리를 굴복시키는 동시에 가슴을 무너뜨리는 영화를 만난 적은 없었다.”

같은 영화를 ‘베스트’로 꼽았던 이들은 3위(<인크레더블>)와 4위(<기품있는 마리아>)로도 같은 선택을 했다. <인크레더블>은 “<토이 스토리> 이래 가장 유쾌하고 활기찬 픽사 애니메이션”(글라이버먼)으로, “진지한 대화를 끌어들일 만큼 튼실해졌다”(슈워츠봄)고 품평했으며, 헤로인 운반책으로 이용된 콜롬비아 소녀의 이야기 <기품있는 마리아>는 “데 시카와 르누아르의 통찰력”(글라이버먼)을 갖춘 놀라운 데뷔작으로 주목했다.

리사 슈워츠봄

1 사이드웨이(알렉산더 페인)
2 밀리언 달러 베이비(클린트 이스트우드)
3 인크레더블(브래드 버드)
4 기품있는 마리아(조슈아 마스턴)
5 이터널 선샤인(미셸 공드리)
6 무라드(우스만 셈벤)
7 콜래트럴(마이크 리)
8 에비에이터(마틴 스코시즈)
9 귀향(안드레이 즈비야진체프)
10 브라이트 리브스(로스 맥알비)

오언 글라이버먼

1 사이드웨이(알렉산더 페인)
2 이터널 선샤인(미셸 공드리)
3 인크레더블(브래드 버드)
4 기품있는 마리아(조슈아 마스턴)
5 킨제이(빌 콘돈)
6 비포 선셋(리처드 링클레이터)
7 오사마(세디그 바르막)
8 오픈 워터(크리스 켄티스)
9 완벽한 그녀에게 딱 한가지 없는 것(개리 위닉)
10 레이(테일러 핵포드)



미국과 아시아로 갈라진 별표

<타임>의 베스트10

<에비에이터>

이름은 같지만 취향이 다른 두 평론가 리처드 콜리스와 리처드 시클. <타임>의 대표 필자인 이들은 우연치곤 심하다 싶을 만큼 겹침이 없는 답안을 내놓았다. 유일한 교집합인 <사이드웨이>도 2위(콜리스)와 10위(시클)로 점수 차이가 많다. 리처드 콜리스는 장이모의 <영웅>과 <연인>을 나란히 1위에 올린 것을 비롯, 6위로 <무간도>를 꼽는 등 아시아영화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인 반면, 리처드 시클은 <에비에이터>와 <밀리언 달러 베이비>를 각각 1위와 2위로 선정, 미국을 대표하는 거장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콜리스는 한때 정치적 사회적 우화를 들려주던 장이모가 “미스터 무협”(Mr. Martial Arts)으로 변신했다며, 두 영화의 색감과 액션, 장쯔이의 매력을 상찬하고 있는데, 그도 <와호장룡>의 깊이보다 <영웅> <연인>의 화려함을 더 사랑하는 서구 평자들 중 하나인 셈이다. “두 영화의 액션신은 감각적이고 기백이 넘치지만, 더 매력적인 것은 마음속에 이뤄지는 결투다. 이들의 눈길, 미소, 눈물에 날카로운 검보다도 아프게 베인다.” 반면, 시클은 시코시즈와 이스트우드, 두 노장의 열정과 도전에 높은 점수를 준다. “<에비에이터>로 하늘 높이 부상했다”는 스코시즈에 대해서는 “잘 나가는 감독들이 실내악을 연주하는 시대에, 스코시즈는 대담하게도 교향악에 도전했고, 만족할 만한 성과를 보여주었다”고 평한다. 한편 이스트우드에 대해서는 “표현을 단순화하는 대신 진실된 감정을 직접적으로 또 강력하게 드러낸다”면서, 이것은 영화는 물론 인생을 알아야 가능한 화법이라고 전한다.

눈에 띄는 것은 시클이 뽑은 최악의 영화들. 다른 영화지와 평자들의 ‘베스트’ 명단에 자주 오르내리는 <이터널 선샤인>과 <아이 러브 하커비>가 시클의 ‘워스트’로 당당히 선정된 것이다. “<이터널 선샤인>은 사랑을 찾기 위해서 먼저 잃어야 하는 과정을, <아이 러브 하커비>는 정체성을 잃고 또 되찾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이런 미숙한 주제들을 복잡하고 코믹한 장치를 통해 보여주는데, 만든 사람들끼리 재밌어할 순 있겠지만, 정작 관객이 자기 얘기로 공감하고 즐기긴 힘들 것이다.” 결론적으로 ‘겸허하라’ 그리고 ‘담백하라’는 시클의 충고를, 당사자들이 받아들일지는 미지수다.

리처드 콜리스

1 영웅, 연인(장이모)
2 사이드웨이(알렉산더 페인)
3 나쁜 교육(페드로 알모도바르)
4 클로저(마이크 니콜스)
5 이터널 선샤인(미셸 공드리)
6 무간도(맥조휘, 유위강)
7 5개의 장애물(라스 폰 트리에)
8 레이(테일러 핵포드)
9 바다 속으로(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
10 화씨 9/11(마이클 무어)
최악의 영화 : 줄리아 되기(이스트반 자보)

리처드 시클

1 에비에이터(마틴 스코시즈)
2 밀리언 달러 베이비(클린트 이스트우드)
3 베라 드레이크(마이크 리)
4 인헤리턴스(퍼 플라이)
5 키친 스토리(라스 하메르)
6 콜래트럴(마이클 만)
7 기품있는 마리아(조슈아 마스턴)
8 킨제이(빌 콘돈)
9 우즈먼(니콜 케슬)
10 사이드웨이(알렉산더 페인)
최악의 영화 : 이터널 선샤인(미셸 공드리) 아이 러브 하커비(데이비드 O. 러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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