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리포트]
[베를린 2005] 막 올린 제55회 베를린국제영화제, 여전히 영화의 힘을 믿는다
2005-02-16
글 : 이종도
사진 : 이혜정
개막작은 레지스 바르니에 감독의 <맨투맨>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짙은 안개였다. 프랑크푸르트에서 베를린으로 가는 길이 안개에 잠겨, 비행기는 잠시 날개를 접고 멍하니 비행장에 서 있다. 살포시 잠이 들었다가 꿈속에서 코르작 박사(안제이 바이다 감독의 <닥터 코르작>)와 비평가 발터 벤야민과 나치에 항거하다 죽은 잉게 숄(<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을 쓴)을 만났다.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해방된 지 60년, 영화가 세상을 바꾸리라고 말했던 ‘기계복제시대의 예술작품’ 논문이 나온 지 70년. “몇 주년 기념이라고 바깥으로 외출을 나오는 건 좀 유치하지 않나요.” 그들은 살짝 미소만 짓더니 손을 흔들고 사라졌다. 아우프 비더제엔(Auf Wiedersehen: 독일의 작별인사).

거장은 없고, 정치적 근심은 있다

베니스와 칸과 다르게, 55회를 맞은 베를린영화제(2월10∼20일)는 묵묵히 영화가 세상을 바꾸리라는 신념을 보여줬다. 권력자의 심리에 관한 4부작 가운데 하나로, 히로히토와 맥아더의 관계에 초점을 맞춘 알렉산더 소쿠로프의 <태양>(Solnze)과 음울한 도시의 내면을 황폐한 섹스로 보여줄 차이밍량의 <떠다니는 구름>(The Wayward Cloud) 정도를 제외하면 거장이라고 할 만한 이들이 드문 단출한 경쟁부문이다. 다만 아프리카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킨 것만으로도 올해 프로그램은 기대할 만하다. 비경쟁 부문으로 초대된 <호텔 르완다>(Hotel Rwanda)를 비롯해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을 남아프리카 무대로 옮겨 만든 <카예리차의 카르멘>(U-Carmen eKhayelitsha), 남아프리카를 배경으로 만든 개막작 <맨투맨>(Man To Man), 르완다 내전의 트라우마를 그리고 있는 <4월 언젠가>(Sometimes In April) 등 네 작품이 아프리카를 다루고 있다. 르완다의 내전이 남긴 상흔을 들여다보는 두 작품 말고도 팔레스타인 자살 폭탄 테러리스트의 48시간을 묘사하는 ‘지상의 낙원’ 또한 베를린영화제의 근심과 관심을 잘 보여주고 있다.

4년째 베를린영화제를 이끌고 있는 디이터 코슬릭 집행위원장은 이번 영화제의 주제를 이렇게 설명한다. “올해의 초점은 감정을 깊이 건드리고 희망을 일깨우는 다양한 아프리카에 관한 영화들이다. ‘호텔 르완다’의 매니저는 용감하게 수백명의 목숨을 건져내며 카르멘은 불꽃같은 삶의 열망을 보여준다.”

<카예리차의 카르멘>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공식 언어로 만든 작품으로 카예리차 출신의 메조 소프라노인 폴린 말페인이 타이틀 롤을 맡았다. <호텔 르완다>는 영국, 남아프리카공화국, 이탈리아 합작영화다. 테리 조지 감독은 후투 민병대에서 피난온 1천명의 투치족 난민을 구해낸 호텔 매니저 폴 루세사바기나(돈 치들)의 실화를 영화화했다. 미국의 <4월 언젠가>도 르완다 내전의 상처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작품이다. 라울 펙 감독은 호텔 르완다가 만들어진 똑같은 배경에서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려줄 예정이다.

한편 개막일 하루 전에 베를린영화제 집행위는 경쟁부문 상영작 <하이츠>(Heights)를 <페이트리스>(Fateless)로 대체했다. <페이트리스>는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임레 케르테스의 자전소설이 원작으로 유대인의 강제수용소 참상을 그렸다. 케르테스가 시나리오도 직접 썼다. 개막 직전 상영작 교체에 대해 억측이 떠돌고 있지만 집행위는 아직 공식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다. 애초 케르테스는 <페이트리스>의 경쟁부문 탈락에 대해 강하게 비난했고, 디이터 코슬릭 위원장은 2월8일 “올해도 나치와 홀로코스트에 관한 작품은 이 작품 없이도 충분하다”고 말한 바 있지만, 갑작스럽게 상황이 완전히 뒤집어진 것이다. 보기 드문 이 스캔들은 베를린영화제의 공신력에 두고두고 부담으로 남을 듯하다.

프로이센의 통일을 구가했던 영광과 동서로 강제 분리된 상처를 함께 지닌 도시 베를린처럼 영화제도 모순적이고 복합적이다. 이 모순이 아름다운 긴장을 불러일으키고 사람들을 불러모아야 할 텐데 그게 뜻대로만 되지는 않는다. 정치적이고 논쟁적인 작품들이 선을 보이지만 사람들을 잡아끌기 위해 할리우드에 손을 내미는 것이 베를린의 관례다.

예년보다 할리우드 저예산영화와 최근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아시아영화 대신 낯선 유럽영화들이 얼굴을 내밀었다. 미국영화 4편, 프랑스영화 4편, 독일영화 3편이 경쟁부문에 올랐다. 코슬릭 위원장은 <로이터>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혔다. “독일과 프랑스영화는 확실히 엄청나게 강해졌고 자국 박스오피스를 비롯해 유럽에서도 빠른 신장세를 보이고 있다. 미국영화가 좋지 않다는 게 아니라 유럽영화들이 좋은 게 더 많다는 뜻이다.” 이번 영화제는 내년 독일월드컵을 미리 알리는 자리이기도 하다. 경쟁부문에 오른 <유럽에서의 어느 하루>(One Day In Europe)는 러시아, 터키, 스페인과 독일의 축구팬들이 도둑들에게 뒤통수를 맞는 사건을 다룬 영화다. 코슬릭은 독일축구협회, 프란츠 베켄바워 등과 손잡고 2006년 월드컵을 홍보하는 행사도 치를 예정이다.

영화는 세상을 바꿀 수 있다

개막일 전날 밤, 안개비가 도심의 소음과 분주함을 차분하게 적셨다. 영화제의 심장이라 할 포츠담 광장 한복판의 소니센터가 발하는 푸른빛과 아이맥스 극장의 노란 불빛이 일찌감치 불 꺼진 도심 한가운데를 밝혔다. 내일이면 52개국에서 온 343개 영화를 보기 위해 3천명이 넘는 기자를 비롯해 영화제 인파들이 포츠담 광장을 누빌 것이다. 아카데미 시상식 탓에 윌 스미스나 키아누 리브스 정도를 뺀다면 많은 할리우드 스타들이 베를린을 찾지는 못하겠지만, 그래서 1월이나 3월로 일정을 바꿔야 하는 게 아니냐는 고민이 또 새어나오겠지만 영화제는 숨가쁘게 흘러갈 것이다.

피카소의 그림이 특권층한테만 향유된다면 채플린의 영화는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계기가 된다고 벤야민은 적었다. 물론 거꾸로 그것이 파시스트의 정치적 선전도구가 될 수도 있고, 싸구려 패스트푸드처럼 사람 속을 망칠 수도 있지만, 베를린영화제는 벤야민적인 신념을 쉬지 않고 밀고 나아가고 있다. 아프리카에 대한 영화제의 관심이 바로 이게 아닐까. 뒤늦게 코르작 박사 일행의 등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래도 웨스 앤더슨 감독의 따뜻하고 귀여운 코미디영화랑 피터 그리너웨이, 스탠리 큐브릭 등을 다시 보여주는 회고전 ‘세팅, 장소, 장면’이 더 기대가 되지만, 잘 가세요. 아우프 비더제엔.”

인종주의에 대한 너무 우아한 고발

개막작 레지스 바르니에의 <맨투맨>

레지스 바르니에의 <맨투맨>이 베를린영화제의 서막을 열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가운데 포츠담 광장의 시네맥스 극장 좌석은 스무살 먹은 대학 신문기자부터 백발이 성성한 베테랑 기자까지 1천여명 가까운 기자들로 금세 가득 찼다.

과학이라는 이름 아래 저질러진 야만을 고발하는 레지스 바르니에의 목소리는 담담했고 기품 있었다. <인도차이나>(1992)와 <동쪽-서쪽>(1999)의 감독 레지스 바르니에가 영어로 만든 첫 작품. 인간의 기원을 찾아 영국의 과학자들이 1870년 중앙아프리카로 떠난다. 이른바 ‘잃어버린 고리’라고 불리는 인간과 유인원 사이의 고리를 찾기 위해서다. 인종학자 제이미 도드(조셉 파인즈)와 여행가 엘레나(크리스틴 스콧 토머스)는 ‘인류의 기원’을 생포한다. 제이미는 피그미족 토코(로마마 보세키)를 ‘나의 아메리카’라고 부르며 환희에 젖는다. 그러나 만만치 않은 지력의 소유자인 토코와 리콜라(세실 바히야)는 오히려 제이미에게 그것이 한갓 오만임을 일깨운다.

토코와 리콜라는 길들여지지 않고 서구인의 총에도 제압당하지 않는다. 여기서 제이미와 제이미의 동료들은 갈라서게 된다. 제이미는 토코와 리콜라가 지성과 감성을 갖춘 사람임을 인정하지만 알렉산더(이안 글렌)와 프레이저(휴 본느빌)는 피그미족이야말로 인간과 유인원 사이를 이어주는 ‘잃어버린 고리’라며 연구 견본으로만 이용하려 한다. 토코에게 죽임을 당할 뻔한 위기를 여러 번 넘기고도 제이미는 그와 소통을 하려 하지만 동료들은 토코와 리콜라를 에든버러 동물원 우리에 가둔다. 그들은 제이미까지 우리에 가두고 학술원에서 ‘잃어버린 고리’를 자랑스레 발표한다.

감독은 왜 19세기로 돌아가 인종주의를 이야기하는가. 감독은 “슬프게도 우리가 여전히 인종주의적인 시대에 살고 있으며 서로의 이해가 부족한 시대에 살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인종주의의 악취를 말하지만, 비서구인 관객은 몸으로 절실하게 배운 차별의 역사가 저렇게 기품 가득하게 나올 수 있나 하고 입을 벌리게 된다. 바르니에는 마음과 마음이 서로를 건드리고 여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고 했지만 역설적으로 서구인의 인색한 관용을 보여준 것밖에는 되지 않았다.

피바람 부는 인종청소의 현장 대신 학술원의 역사 속으로 거슬러올라간 것은 그만큼 뜨거운 이슈와 대결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영화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엔딩 타이틀이 오르기도 전에, 수백명의 기자들이 조용히 기자회견장과 기사작성실로 흩어졌다.

자료제공 진화영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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