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영화]
내 영화의 시작, <레즈>
2001-07-04

내가 워런 비티 감독·주연의 영화 <레즈>(Reds)를 본 것은 94년이었다. 2년 만에 처음 본 영화였다. 아니 정확히 말해, 중간쯤에 남몰래 숨어서 보았던 그 영화, <사랑과 영혼>을 제외한다면 5년 만에 처음 영화를 접해본 셈이었다. 영화는 천상 부르주아 매체라는 당시의 앳된 신념은, 몰래 수업 빼먹고 운동장을 포복으로 빠져나와 개봉관으로 달려갔던 고등학교 시절의 내 영화감독 꿈도 쉽게 단념케 했고, 누구 한명 나무라지 않을 게 분명한데도 몇년 만에 선후배들 몰래 찾아 들어간 극장에서 <사랑과 영혼>을 보며 전혀 동감할 수 없는 한 여성관객의 흐느낌을 들으며 자괴감에 빠져들기도 했다.

그럼, 내가 투사였냐 하면, 그건 그 소리를 들으면 날 아는 사람들이 분명 웃어 나자빠질 만큼 난센스 같은 질문이다. 난 그저 맹숭맹숭한 관념론자에 지나지 않았다. 지금 역시 그러하고. 하지만 94년 가을쯤이던가, 학술 세미나를 빙자해서 우연찮게 보게 된 <레즈>는 영화 속의 탁 트인 설원의 경치처럼 그간 내 속에 켜켜이 쌓여 있던 막막함들을 일거에 물리치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역설적이게도, 크렘린에 입성한 존 리드를 환영하느라 노동자들이 불렀던 인터내셔널가보다는 러시아 혁명 이후의 고요한 불만들을 목도하는 존 리드의 흔들리는 시선이 바로 그 예기치 못했던 힘의 근원이었다. 그리고 94년 겨울, 난 책 한권과 팬티 두장을 들고 영화를 공부하기 위해 서울행 기차를 타고 있었다.

영화 <레즈>는 미국의 급진적 사회주의 사상가 존 리드의 생애를 다루고 있다. 그는 1917년 러시아 혁명을 묘파한 <세계를 뒤흔든 10일간>의 저자이면서, 나중에 크렘린에 안장된 유일한 미국인이기도 하다. 영화는 존 리드가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이는 시점부터 시작해서, 1917 혁명 이후에 러시아로 건너가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면서 느꼈던 복잡한 심경과 그의 죽음에까지 이른다.

내 눈에 비친 존 리드는 모호한 인간이었다. 그칠 줄 모르는 혁명에의 열정, 그리고 혁명 이후에 점차 부상하는 또다른 권력에 대한 씁쓸한 물러섬을 동시에 느꼈던 그는 ‘뭔가’를 여전히 기다리고 있는 자의 모습이었다. 물론 그것은 흔해빠진 내러티브일지 모른다. <레즈>로 감독으로서의 역량을 인정받은 워런 비티 역시 그 양가적 느낌을 표현하기 위해 상투적인 수법을 사용하긴 했다.

그렇지만 존 리드는 기차로 러시아 평원을 질주하며 대중에게 혁명 대의를 설파하면서도 정작 대중의 직접적 삶과 욕망에 대해서는 일치된 호흡을 보이지 않았던 볼셰비키로부터 한 발짝 떨어져 ‘혁명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한 인간처럼 보인다. 그는 환멸을 느꼈던 걸까? 오히려 그거보다는 ‘더 나은, 더 기쁜 혁명’을 원했는지도 모르겠다. 맨발로 춤출 수 없는 혁명은 또다른 억압에 불과하며, 결국 종착역 없이 산개한 정거장들마다 멈추고 달리고 하는 것이 혁명의 운동성이기에 애초에 혁명 같은 건 없다는 내 좁은 소견이 사후 접목된 건지도 모르겠고.

또, 그 영화의 매혹을 말할 때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이 존 리드와 브리안과의 사랑이다. 우디 앨런의 연인이었다가 <레즈>에서 실제로 워런 비티와 연정을 나누었던 다이앤 키튼이 분했던 브리안은 공산주의자이면서 여성해방론자였다. 부끄럼없이 처음 만난 존 리드 앞에서 훌러덩 옷을 벗어던진 브리안은 나중에 미국의 저명한 희곡가 유진 오닐과 바람을 피우기도 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잭 니콜슨이 분했던 유진 오닐과 브리안이 바람을 피우는 장면을 존 리드가 목격하는 대목이다. 오랜 여행을 마치고 온 존 리드는 질투에 눈이 먼 남편의 역할 대신 현관 앞에 들고 왔던 꽃다발을 조용히 놓고 눈밭 속을 걸어가는 것으로 ‘소유욕 없는 사랑’을 이야기한다.

영화를 보고 난 이후 지금까지 그 장면을 떠올릴 때마다 ‘과연 나도 저렇게 사랑할 수 있을까?’라고 반문하곤 했다. 그 소유욕 없는 사랑은 말많은 호사가들이 공산주의와 공창제도, 일부일처제 부정 등을 억지 연계시켜 떠들어대는 것과는 하등 상관이 없어 보인다. 연인을 자신의 소유욕을 초월하는 타자로 존중하며 사랑하는 일, 그것은 생각만큼 녹록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94년 서울행 기차를 타고 있던 내가 영화 <레즈>에 대해 생각했다, 라고 말하면 드라마적인 거짓말이 될 게다. 하지만 지금 독립영화를 자처하며 한편 두편 계속 영화를 찍어나가는 와중에 이따금 존 리드의 생애에 대해 생각한다, 라는 것쯤은 솔직히 말해도 될 것 같다. 그렇다고 영화공부를 위해 보는 걸작들처럼 <레즈>를 두번 세번 보지는 않는다. 전혀 보고 싶지 않다.

그것은 영화적 완성도와 별개로, 이따금 자기 생애의 흐름을 헤집는 영화를 만났을 때, 두번 다시 그 저릿한 느낌, 그 두려운 느낌과 조우하고 싶지 않은 그런 비겁한 태도일 뿐이다.

이송희일/ 단편 <슈가힐> <굿 로맨스> 연출, 장편 <곤돌라> 준비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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