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뉴스]
실존인물 다룬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 2편
2005-02-22
글 : 김은형 (한겨레 esc 팀장)
글 : 임범 (대중문화평론가)

오는 28일 시상식이 열리는 아카데미 영화제의 작품상 후보엔, 실존인물을 다룬 영화가 유달리 많다. <에비에이터>, <네버랜드를 찾아서>, <레이>, <사이드웨이>, <밀레니엄 베이비> 등 다섯 편의 후보작 중 앞의 세 편이 실제 인물의 이야기다. 미국의 대부호 하워드 휴즈를 다룬 <에비에이터>가 지난 11일 개봉한 데 이어, 오는 18일 <네버랜드를 찾아서>와 <레이>가 나란히 개봉한다. 편집자


<레이>

<레이>

영화 <레이>를 보면서 새삼 느끼는 건, 레이 찰스의 노래 가사들이 무척 단순하다는 점이다. 가스펠에 블루스를 접목시킨, 솔의 효시라고 불리는 그의 1954년 곡 ‘내게 여자가 생겼어(I’ve got a woman)’의 가사는 이렇다. “내게 여자가 생겼어, 읍내에서 만났어, (그 여자는) 내게 잘해 줘, 내게 여자가 생겼어…” 영화는 레이 찰스가 이 노래를 만드는 과정을 보여준다. 나중에 부인이 되는 델라의 집에 놀러가서 그 집 피아노를 치면서 즉석에서 가사를 만들어 부른다. 일종의 사랑 고백인 셈이다. 더 이상 무슨 수사가 필요할까? 흥겹고 구성진 리듬, 단순하면서도 음의 높낮이가 큰 멜로디, 저음과 비음이 절묘하게 뒤섞이는 보컬로 설렘과 행복감을 충분히 표현하고 있는데 말이다. 그 노래에선 이전에 힘들게 살았다는, 노래 부르는 이의 애환까지 전해진다.

전설이 된 영혼의 음성 레이 찰스 일대기 다뤄
시각장애·동생의 죽음딛는 인간승리 드라마

<레이>

지난해 세상을 떠나 전설이 돼가고 있는 가수 레이 찰스(1930~2004)의 일대기를 다룬 <레이>는 레이 찰스의 노래를 닮아있다. 노래로 치면 가사에 해당하는 줄거리는 간결하게 양념처럼 곁들인다. 나머지 부분인 멜로디와 리듬, 보컬이 자아내는 신명과 감흥을 레이 찰스가 노래하는 장면을 통해 연출한다. 레이의 인기가 급상승하면서 레이가 약간 오만해진다 싶을 땐 기교가 센 노래를 부르고, 부인과 애인 사이에서 두집 살림하다시피 하다가 스스로 지쳐 달아나고 싶어하는 듯 한 대목에선 환각적인 고음이 전면에 나서는 곡의 연주장면이 이어진다. 이런 식으로 레이의 삶을 다루는 드라마에서 어떤 감흥이 생기면, 바로 다음 장면에서 노래로 그 감흥을 낚아채 증폭시키기를 반복하면서 뮤직비디오 형식의 세미 다큐멘타리 같은 영화를 만들어간다.

그러나 <사관과 신사>, <백야> 같은 줄거리 중심의 대중 영화를 연출한 테일러 핵포드 감독은 줄거리의 중요성을 놓치지 않는다. 영화 속에서 레이가 컨츄리 음악을 부르면서 하는 말은 어쩌면 감독의 자기고백 같다. “사람들이 컨츄리를 좋아하는 건, 그 안에 줄거리가 있기 때문이야.” 영화는 어린 시절의 동생의 죽음, 시력 상실에서 오는 만인에 대한 불신, 그로 인해 자꾸 떠도는 여자 편력 등 이해하기 어렵지 않은 변수들을 섞어 드라마를 꾸리되 어느 하나에 집중하지 않는다. 이게 너무 가벼울지 모른다는 자기 부담의 반영인 듯 결말에선 레이가 약물 중독을 이겨내는 인간 승리의 드라마를 연출한다. 이건 눈살을 찌푸리게 할 만큼 심한 단순화로 보이지만, 그 결점을 눈감아 줄 수 있을 만큼 이 영화의 노래 장면은 인상깊다. 이미 골든글로브 남우주연상을 받은 레이 역의 제이미 폭스의 노래 부르는 모습은, 라이브 공연을 보는 것 이상의 감흥을 전달한다.


<네버랜드를 찾아서>

네버랜드를 찾아서

<네버랜드를 찾아서>는 <피터팬>을 쓴 제임스 매튜 베리(1860~1937)의 초상을 그린 영화다. <에비에이터>나 <레이>처럼 실존인물을 그리고 있지만 독특하게도 이 영화는 사실의 고증이나 사건의 재현에 큰 관심이 없다. 오히려 영화는 배경이 되는 객관적 사실의 일부를 첨삭하면서 <피터팬>이 완성되기까지의 에피소드를 극적으로 배치한다. 한 예로 베리가 실제로 사귀었던 데이비스가의 아이들에게는 아버지가 있었지만 영화에서는 아버지를 여읜 아이들로 설정하면서 베리를 유사 아버지이자 네 아이들의 엄마인 실비아의 정신적 연인으로 배치한다.

‘피터팬’ 어떻게 만들어졌나, 어른이 되기싫은 극작가 베리
꿈을 잃은 피터에게 상상의 나래를 달아 준다

<네버랜드를 찾아서>

막 무대에 올린 새 연극이 실패해서 의기소침한 젊은 극작가 베리(조니 뎁)는 공원에서 데이비스가의 가족들을 우연히 만난다. 베리는 함께 산책나온 개와 아이들 앞에서 소극을 보여준다. 커다란 개를 곰이라고 생각하며 벌이는 연극에 조숙한 꼬마 피터를 제외한 아이들이 열광하면서 베리는 아이들과 친해진다. 상상을 통해 개를 곰으로 볼 수 있는 아이들의 세계에서 베리는 아이들보다 더 행복해한다. 영화는 그가 아이들과 벌이는 인디언 놀이나 해적 놀이의 배경을 실제 바다나 미국 서부로 전환시키면서 환상과 현실을 자유자재로 오간다. 이 환상의 세계는 실제로 6살 때 형의 사고사를 겪은 뒤 어른과 어린이의 세계 중간에서 살았던 베리의 머릿 속 풍경이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나이를 먹어가며 점차 좁아지게 마련인 상상의 영토를 광활함 그대로 간직한 그의 소년성은 어른으로 일상을 사는 데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평범한 어른인 아내는 데이비스가에서 살다시피하는 남편에 대한 상실감으로 괴로워하고 실비아(케이트 윈슬럿)의 어머니는 유부남이 과부의 집에 들락거리며 추문을 낸다고 원망한다. 아버지를 잃은 상처로 너무 빨리 자라버린 피터는 “모든 게 연극일 뿐”이라고 베리를 비난한다. 꿈을 잃은 피터가 다시 상상의 거처에서 ‘날 수 있도록’ 만든 <피터팬>의 첫 공연에서 피터의 주변에 모인 어른들이 “네가 피터팬이구나”라고 관심을 표할 때 피터가 베리를 가리키며 말하는 것처럼 진짜 피터팬은 바로 베리 자신이었다.

동심을 잃지 않은 어른과 사회 부적응자라는 말은 동전의 양면이다. 아이들과 상상 놀이에 흠뻑 빠져있는 베리의 모습은 더할 수 없이 해맑지만 주변사람들의 만류에도 매일 데이비스가에 찾아가 문을 두드리는 그의 모습은 굳게 닫힌 대문 앞에서 “철수야 놀자”를 외치는 키 큰 아이처럼 측은하고 쓸쓸해 보인다.

이 영화에서 베리 역의 조니 뎁은 감독뿐 아니라 관객에게도 너무나 당연한 선택처럼 보인다. <베니와 준>에서 엉뚱한 베니와 <가위손>에서 세상과 고립된 채 살아가는 에드워드를 뒤섞어 놓은 듯한 조니 뎁의 연기는 극도로 절제돼 있지만 천진함에 드리워진 스산함의 그늘은 고요하면서도 깊은 슬픔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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