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비극과 로맨스로 위장한 코미디, <클로저>
2005-02-23
글 : 듀나 (영화평론가·SF소설가)
<클로저>에서 모차르트의 오페라를 연상한 이유

마이크 니콜스의 <클로저>에서 거의 고정 배경음악처럼 사용되는 노래들이 있는데, 그건 바로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오페라 <코지 판 투테>의 중창곡들이다. 영화를 보다보면 니콜스의 이 선택이 거의 교과서적으로 느껴지는데, 자신과 상대방의 불륜이나 서로에 대한 불신으로 고통받는 모차르트 오페라의 주인공들과 <클로저>의 주인공들 사이엔 큰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언뜻 보기에 니콜스의 영화가 원작으로 삼은 패트릭 마버의 동명 희곡과 모차르트의 오페라를 일대일로 비교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모차르트의 오페라는 우아한 가사(그게 꼭 좋은 가사라는 의미는 아니지만)와 품위있는 음악으로 가득 찬 고전이다. 반대로 마버의 희곡은 처음부터 끝까지 섹스와 관련된 온갖 상스러운 말들을 입에 달고 다니는 사람들에 대한 야비한 이야기이다.

<코지 판 투테> = <클로저> = 노골적 연애담

그러나 이런 차이점은 허울에 불과하다. <코지 판 투테>의 주인공들은 <클로저>의 주인공들과 마찬가지로 천박하고 저열하다. 마버 자신도 자신이 <코지 판 투테>의 세계에 발을 담그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주드 로가 연기하는 작가 겸 부고 전문 기자인 댄과 내털리 포트먼이 연기하는 스트리퍼 알리스가 처음 만나 나누는 대화의 소재 중 하나는 바로 완곡어법이다. 부고 기사를 쓰는 게 직업인 댄은 어떻게 고인의 명예를 손상하지 않고 사실을 간접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고인은 쾌활한 성격이었다’라고 나와 있다면 그건 알코올 중독자였다는 뜻이죠. ‘고인은 프라이버시를 중시했다’는 그가 게이였다는 뜻이고요. ‘고인은 자신의 프라이버시를 즐겼다’면 그가 엄청 잘 노는 게이였다는 뜻이죠.” 댄의 이런 대사는 마버에게 하나의 선언이다. 그는 곧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은 대부분의 옛 작가들이 예의를 갖추어가며 고상하게 다루었던 부류의 이야기를 보게 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여러분이 익숙해진 그 모든 완곡어법들을 제거한 뒤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다.”

<코지 판 투테>가 그런 것처럼, <클로저>는 자기들에게 떨어진 행복을 누릴 자격이 없는 네 남녀의 이야기이다. <코지 판 투테>의 남자주인공들이 여자친구들의 정절을 의심하고, 거기에 대해 내기를 걸고 실험하고, 최종적으로 모두가 함정에 빠지는 것처럼, <클로저>의 주인공들은 파트너를 배반하고 불륜을 자청하고 새 관계를 일부러 깨트리고 상대방을 모욕하고 배반하면서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지옥으로 빠트린다. 이들은 모두 상당히 불쾌한 인물들이라 좋아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여러분은 적어도 그들의 불운을 동정하고 그들의 입장을 여러분의 입장에 대입하며 동정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들의 감정은 진지해 보이고 네 배우들(주드 로, 내털리 포트먼, 클라이브 오언, 줄리아 로버츠)은 모두 이들의 감정을 생살을 도려내는 것처럼 힘있게 연기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로맨스? 알고보면 블랙코미디!

그러나 속지 마시길. <클로저>의 내용과 주제는 어둡지만 이 작품은 기본적으로 코미디, 그것도 아주 작정하고 만든 코미디이다. 만약 댄과 알리스, 안나와 래리의 관계가 댄과 안나의 불륜으로 파괴되는 것으로 끝난다면 (적어도 알리스와 래리에게) 그 이야기는 비극일 것이다. 그뒤 댄과 안나의 관계가 또 다른 배신과 고백에 의해 종결된다면 그건 일종의 교훈극일 것이다. 하지만 간신히 다시 맺어진 댄과 알리스의 관계가 또다시 그 의미없는 진실에 대한 집착에 의해 파괴된다면 여기서부터 우린 이 이야기가 코미디임을 확신하게 된다. 벼락이 어떤 자리에 한번 떨어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두번 떨어진다면 그건 희귀한 사건이다. 하지만 세번이나 같은 자리에 떨어진다면 이건 분명한 고의이고 장난이다. 신을 흉내내는 누군가가 위에서 네 주인공들을 가지고 놀면서 키득거리고 있는 것이다.

광고 문구들이 말하는 것과는 달리 <클로저>는 러브스토리가 아니다. 이 작품을 처음부터 끝까지 자세히 들여다보길. 이 작품에서 로맨스는 단 한번도 진지하게 그려지거나 다루어지지 않는다. 교통사고로 댄과 알리스가 만나는 장면은 거의 짜증이 날 정도로 도식적인 클리셰로 장식되어 있다(감독인 니콜스도 감상적인 배경음악과 뻔한 고속 촬영으로 그 진부함을 극대화시킨다). 안나와 래리가 만나는 장면은 그보다는 조금 덜 인공적이지만 그래도 이들은 뒤에서 그들을 조종하고 있는 사악한 제3자의 장난감에 불과하다.

마버는 본격적인 이야기에 접어든 뒤 일어나는 일련의 불륜들을 묘사하는 데에도 불친절하다. 만약 제대로 된 러브스토리라면 댄이 왜 안나에게 빠졌는지에 대해 상당한 시간을 들여 설명할 것이며 어떻게 안나가 댄의 유혹에 응답했는지에 대해서도 그만한 시간을 투자할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당연히 나와야 할 법한 심리묘사들을 모두 잘라버린다. 유혹의 과정은 드러나지만 그 유혹을 움직이는 동기나 최종 반응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들은 모두 이후에 이어질 배반과 파국을 그리기 위한 준비 단계에 불과하다. 댄이 얼마나 빨리 알리스에 대한 사랑을 접고 안나에게 수작을 거는지 보라.

그뒤에 이어지는 배신과 파국의 드라마도 자연스러운 심리묘사의 흐름을 따르고 있지 않는 건 마찬가지이다. <클로저>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대부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배반당한 남편이 정부의 옛 여자친구를 유혹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이미 배신과 불륜으로 맺어진 연인들이 서로를 의심하는 것 역시 그만큼 당연하다. 그렇게 자신을 배반한 남자친구에 대한 감정을 접는 것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이런 배신과 파국들이 예외나 휴지기 없이 연달아 이어지고 모든 등장인물들이 윔블던 테니스 선수들 뺨치는 게임 실력을 발휘하며 서로의 심장에 공을 날려댄다면 여러분은 뭔가 잘못되었다고 의심해야 한다.

작가 패트릭 마버의 사디스틱한 쾌락

댄의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보자. 그는 자신에게 문학적 영감을 준 여자친구 알리스를 배신하고 사진작가 안나를 끈질기게 유혹하다 결국 안나를 남편 래리로부터 빼앗는다. 알리스와 래리에게 자신이 안겨준 상처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고 즐거워하던 그는 안나와 남편 래리가 자기와 사귄 뒤에도 잤다는 걸 물고늘어지다 결국 안나와 헤어진다. 그뒤에 간신히 알리스와 재결합한 그는 이번엔 그들이 헤어져 있는 동안 알리스와 래리가 잤는지 꼬치꼬치 캐묻다가 간신히 회복한 관계를 또다시 깨먹는다. 지금까지 언급한 댄의 행동들을 검토해보면 그는 둘 중 하나다. 자멸하고 싶어 작정한 마조히스트이거나 계산 능력이 전적으로 결여되어 있는 바보이거나. 하지만 설정에 따르면 댄은 둘 다 아니다. 그는 영리하고 심리 파악에 능하고 이기적인 쾌락주의자이다. 그런데 이 똑똑한 젊은이가 자신과 남을 때려잡는 일만 골라서 하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왜? 그건 이들이 겪는 파국과 불운이 주인공들의 자유의지나 무작위적인 우연의 일치에 의해 짜여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작정하고 서로를 최대한으로 괴롭히기 위해 만들어진 도구들이고, 그들의 유일한 목적은 패트릭 마버라는 뻔뻔스럽고 야비한 신의 사디스틱한 쾌락을 만족시키는 것이다. 그 목적을 위해서라면 그들은 설정에 맞지 않은 행동이라도 자발적으로 한다. <클로저>는 불쾌한 이기주의자들에 대한 영화지만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작가 패트릭 마버의 사악함을 능가하지 못한다.

그런 면에서 <클로저>는 존 맥노튼의 야비한 코미디 <와일드 씽>과 많이 닮았다. 현대식 필름누아르를 흉내내고 있는 이 뻔뻔스러운 블랙코미디의 목적은 규칙적이고 기계적인 일련의 반전을 하나씩 깔면서 장르의 규칙을 놀려대고 그 희극적 리듬으로 관객을 자극하는 것이었다. <클로저> 역시 같은 일을 한다. 이 영화의 장면들을 다시 한번 보시길. 대부분 하나의 시퀀스(대부분 연극의 한장을 그대로 옮겼을 것이다)는 두 사람에 의해 독점되고 있고 그들의 관계는 거의 언제나 가해자와 피해자이고, 이런 설정은 캐릭터들의 조합만을 바꾸어가며 영화가 끝날 때까지 반복된다. 구체적인 디테일을 제거한다면 이 이야기들은 몇줄의 알고리즘으로 충분히 요약될 수 있다. <클로저>가 이 설정에 진지하기만 했다면 이런 식의 공식은 절대로 만들어질 수 없다. 대부분의 진짜 인간들은 이보다 복잡하게 마련이다.

고전 코미디를 연상시키는 희극적 난관의 연쇄

결국 우리는 이 음담패설과 욕설들로 가득 찬 이야기가 굉장히 전통적인 작품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클로저>는 18세기나 19세기에 유행했을 법한 유럽의 코미디에 가깝다. 사방에 문이 여닫히고 주인공들이 빠져나갔다가 다시 돌아오며 모두가 함정에 빠졌다가 간신히 주인공만 빠져나오는 그런 이야기 말이다. 주인공의 심리묘사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을 희극적인 난관에 빠트리는 어처구니없는 설정 자체이다.

말이 좀 험할 뿐, <클로저>는 이 공식에 충실하다. 그뿐만 아니라 이 작품은 그 당시의 희극들이 갖추었던 우아함도 많이 남겨놓고 있다. 안나인 척 흉내내는 댄과 래리가 인터넷 채팅룸에서 나누는 음담패설들은 모차르트의 아리아처럼 경쾌하고 발랄하며 위트가 넘친다. 한참 동안 피해자로 깔려 지내다가 기회를 잡아 가해자로 위치를 바꾼 래리가 가학의 쾌락을 즐기는 후반부는 교활한 설정과 가학적 언어, 위장된 투박함이 결합된 발레와도 같다. 이렇게 보면 완곡어법에 대한 <클로저>의 선언은 또 다른 위장처럼 보인다. <클로저>의 비관주의는 인간관계에 대한 사실적인 접근법과 큰 관계는 없다. 이 영화는 노골적이고 상스러운 언어, 시치미를 뚝 뗀 비관주의와 야비함으로 위장한 보마르셰식 코미디에 더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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