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스코프]
<주온>의 도플갱어, <그루지>
2005-02-24
글 : 김도훈

2000년 여름. 소리소문 없이 발매된 비디오영화 하나가 일본 열도를 돌며 습하고 막막한 공포를 전염시켰다. 시미즈 다카시의 <주온>이었다. 입소문으로 시작된 열기는 곧 극장판 <주온> <주온2>로 이어졌고, 제한상영에도 불구하고 주목할 만한 박스오피스 성적을 거두었다. 한국에서 <주온>은 100만 관객을 돌파한 두 번째 일본영화가 되었다(첫 번째는 이와이 순지의 <러브레터>다). 그 어슴푸레한 다락방의 공포가 태평양을 건너가더니 다시 태평양을 건너오는 중이다. 할리우드에서 새롭게 리메이크된 <주온>의 제목은 <그루지>(The Grudge). ‘원한’이라는 의미다.

태평양 건너에서 <주온>의 리메이크를 기획했던 사람은 <스파이더 맨>의 감독 샘 레이미. 그는 “지금까지 본 가장 소름끼치는 공포영화”라며 시미즈 다카시의 재능을 극찬했고, 직접 설립한 고스트하우스픽처스를 통해 리메이크를 결심했다. 동시에 그는 <링>이나 리메이크가 진행 중인 <검은 물 밑에서>처럼 원전의 설정만을 가져와 할리우드식으로 가다듬는 방식이 아니라 오리지널의 장점을 온전히 지닌 영화를 만들고 싶어했다. 심지어 샘 레이미는 감독과 스탭, 영화의 무대 역시 오리지널 그대로 보존하기로 마음먹었다. “내용을 수정해서 미국에서 만들면 더 쉬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식의 리메이크는 오리지널이 지닌 공포를 잃어버리게 될 위험성이 있다.” 일본식 가옥의 독창적인 구조로부터 주요한 공포장치들이 숨을 얻었던 <주온>을 미국식 저택의 온기 속에서 풀어나갈 수 없다는 믿음이었다. 주연을 맡은 사라 미셸 겔러(<버피와 뱀파이어>)와 빌 풀먼(<인디펜던스 데이>) 등의 할리우드 배우들을 제외한다면, <그루지>는 <주온>의 리메이크작이라기보다는 다른 언어를 구사하는 도플갱어에 가깝다.

미국 언론들은 “영어로 만들어지면서 원작의 공포가 길을 잃었다”(lost in translation)는 박한 평가를 내렸다. 그러나 관객은 예전에 보지 못했던 종류의 공포영화에 목이 말라 있었다. 2004년 10월22일 할로윈을 맞아 전미 3천여개의 극장에서 개봉한 <그루지>는 3일간 4천만달러를 벌어들이는 저력을 발휘했고, 2주 만에 총수익 1억달러를 넘어서는 성공을 거두었다. 고양이 소년 토시오의 이미지에 이미 익숙해진 본고장의 관객에게도 ‘원한’은 생명력을 얻을 수 있을까. <그루지>는 지난 2월11일 일본에서 개봉해 본토의 관객을 만나는 중이다.

<그루지> 예고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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