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젊은 레이 찰스의 환생, <레이>의 제이미 폭스
2005-02-24
글 : 박은영

제이미 폭스는 밋밋한 흑인 남자의 얼굴을 지녔다. 덴젤 워싱턴처럼 지적인 미남형도 아니고, 윌 스미스처럼 세련되거나 친근하지도 않다. 크리스 록이나 마틴 로렌스처럼 익살맞은 장난꾸러기 이미지도 아니고, 포레스트 휘태거나 로렌스 피시번처럼 영묘한 카리스마를 풍기지도 않는다. 어느 누구도 아니고, 어느 누구도 될 수 있는 얼굴. 그래서일까. 폭스는 장르와 캐릭터에 자신을 가두지 않고, 자유로운 행보를 보여왔다. 심지어 그의 분신들은 시작과 끝이 확연히 다르다. 필드에 오바이트를 해대는 소심남에서, 감독의 작전을 무시하는 기고만장 벼락 스타로, 다시 팀워크의 교훈을 깨닫고 진정한 팀 플레이어로 거듭나는 쿼터백의 다이내믹한 변화를 보자(<애니 기븐 선데이>). 무하마드 알리의 정신적 지주였다가, 마약의 유혹에 챔피언 벨트를 팔아먹는 파렴치한으로 추락하던 모습도 있었다(<알리>). 악질 킬러에게 끌려다니다, 공모자가 되길 거부하며 몸부림치던 <콜래트럴>의 택시기사도, 밤새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러니 솔의 대부 레이 찰스의 “몸과 마음의 장애를 모두 극복해가는” 수십년의 여정 <레이>에 그가 동행한 건 자연스러운 도전으로 보인다.

레이 찰스가 젊었을 땐 저런 모습이었겠구나. <레이>의 제이미 폭스를 보고 있으면, 그런 생각이 든다. 다리를 번갈아 기우뚱대는 걸음걸이, 허연 이가 전부 드러나는 함박웃음, 흥에 겨울 때 양팔로 몸을 감싸안는 버릇, 리드미컬하면서도 똑똑 끊어지는 말투를 빼다박은 건, 어쩌면 사소하다. 처음 만난 레이 찰스와 함께 펑크와 가스펠과 블루스 등 다양한 곡을 협주해내, “바로 이거야. 이 아이야”라는 탄성을 들었던 폭스는 수준급의 피아노 연주로, 연기 그 이상의 재능을 선보였다. 그게 다가 아니었다. 보이지 않는 척하는 연기는 가짜라고 판단한 그는, 촬영 내내 인조 눈꺼풀을 붙여 앞을 볼 수 없는 상태를 유지했다. “물론 겁도 났지만, 시늉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앞이 보이지 않을 때, 주변의 작은 소음, 내가 연주하는 음악에 집중하게 되더라. 그러고나니 레이의 인생, 그의 행보를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뮤지션의 생애를 연기하면서, 캐릭터의 재능을 단순히 ‘흉내’내는 데 그치지 않았던 것처럼 제이미 폭스가 살면서 쌓은 다양한 경험과 재주는, 그의 연기에 든든한 자양분이 되었다. 부모가 저버린 아들이었던 그는 생모의 양부모에게 입양되는 연속극 같은 가족사를 지녔지만, 교육과 신앙에 열성적이었던 조부모(이자 부모)의 영향으로, 반듯하고 다재다능한 소년으로 성장했다. 전공하던 클래식 피아노가 아닌 R&B에 빠져 학업을 중단한 뒤에, 친구들과 들른 LA의 코미디 클럽에서 운명이 바뀌는 경험을 한다. 남을 웃기는 데 소질이 있던 그는 우연히 무대에 올랐다가, 스탠드업 코미디언이 되었고, TV시트콤과 자기 이름을 건 쇼를 진행하며 인기를 얻었다. <토이즈> <개와 고양이에 관한 진실> 등 간간이 영화 작업을 겸하면서, 코미디언으로서 승승장구하던 그는, <애니 기븐 선데이>의 오디션장에서 청천벽력 같은 말을 듣는다. “그게 연기야? 넌 TV의 노예이고, 코미디언일 뿐이야. 너한테 필름 1인치도 낭비하지 않겠어.” 올리버 스톤의 가혹한 거절의 말에, 그는 움츠러들지 않았다. 학생 시절 유망한 미식축구 선수였던 폭스는 자신의 훈련 모습을 녹화해 보냈고, 결국 스톤의 마음을 돌려놓았다.

“<알리>를 보고 연기가 되는 배우라는 걸 알았지만, 한편의 영화를 이끌어갈 재목인지는 확신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의 재능과 열정에 곧 설득당했다.” <레이>의 테일러 핵포드 감독의 회상이다. 폭스를 다시 보게 된 이는 핵포드 감독만이 아니어서, 그는 <레이>로 오스카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고, 동시에 남우조연상 후보(<콜래트럴>)에도 올랐다. 시드니 포이티어와 덴젤 워싱턴에 이어, 오스카를 수상하는 세 번째 흑인 남자배우가 될지 기대해볼 일이다. 지금 폭스는 <레이> 이후 달라진 자신의 모습을 신기해한다. “레이의 카르마를 이어받은 듯 느껴진다. 누이도 내가 달라졌다고 말한다. 내 안에 레이가 들어와 있는 것만 같다.” 좋은 의미의 변화인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지금, <애니 기븐 선데이>의 쿼터백처럼 “증기를 뿜으며” 달리는 폭스는, 샘 멘데스의 <백치>(Jarhead)를 찍고, 마이클 만의 <마이애미 바이스>로 턴할 예정이다.

사진제공 UIP코리아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