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서린은 20대에 미쳐버린 천재수학자 로버트의 둘째딸이다. 아버지와 단 둘이 살던 그녀는 이제 아버지의 장례식을 기다리고 있고, 서재에선 로버트의 옛 제자 핼이 그가 남긴 100권 넘는 노트를 조사하고 있다. 밤을 함께 보내면서 서로에게 연정을 느끼기 시작하는 캐서린과 핼. 그러나 핼은 잠긴 서랍에 감추어둔 노트에서 발견된 중요한 증명이 자기 것이라는 캐서린의 주장을 믿지 않는다. 뉴욕에서 도착한 큰딸 클레어는 핼의 불신에 광기에 가까운 분노를 터뜨리는 캐서린을 자기 집으로 데려가 정신과 치료를 받게 하려고 한다.
<프루프>는 게임이론을 발견해 노벨상을 수상했고 영화 <뷰티풀 마인드>에 영감을 주기도 한 수학자 내쉬를 모티브로 삼은 연극이다. 그러나 극의 무게는 천재인 아버지를 사랑하면서도 그에게 짓눌려 살았던 딸 캐서린에게 실려 있다. 수학의 재능을 물려받은 캐서린은 아버지를 돌보기 위해 학교도 그만두었지만, 연마할 겨를조차 없었던 재능이 광기로 이어지지 않을까 두려워한다. 20년이 넘게 미친 아버지를 지켜보면서 자신의 미래도 같이 보았을 캐서린. 집안에 틀어박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녀는 언제 닥칠지 모르는 미래 때문에 현재마저 부정한다. 빛이라고는 없는 불행이 사랑하는 아버지에게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그녀는 더욱 불행하다.
공간을 옮기지 않고 캐서린의 집 앞에만 머무는 <프루프>는 박제가 되어가고 있는 젊은 여자에 집중하면서도 틈틈이 유머를 발견한다. 고지식한 핼과 사람 대하는 법을 모르는 캐서린, 단호하고 영리한 클레어는 서로 너무 어울리지 않아서 웃음을 자아낸다. 그리고 누가 수학사에 길이 남을 증명을 해냈는가라는 문제가 있다. 반드시 필요하지는 않은 이 질문은, 플래시백과 추리소설의 기법을 차용하고, 대화로만 이루어진 연극에 긴장을 부여하면서, 2시간 넘는 만만치 않은 상영시간에 속도를 붙인다.
지난해 공연에 이어 캐서린을 연기하는 배우는 추상미. 그 자신도 아버지의 무게를 짊어지고 출발했던 추상미는 천재이면서도 두려움에 갇혀 살던 캐서린이 며칠 사이 살아남는 방법을 터득해가는 과정을 절박하게 연기한다. 애정이 있지만, 벗어나고 싶기도 한, 혈연의 양날을 그녀는 알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웃어라 무덤아> <에쿠우스>의 김광보가 연출을 맡았고, 최광일과 추귀정, 최용민이 출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