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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으로 올바른 판타지, <제니, 주노>
2005-03-02
글 : 황진미 (영화칼럼니스트)
낙태권이 아니라 출산권 주장하는 <제니, 주노>의 미덕

<제니, 주노>에 대한 평가는 ‘어른들의 장삿속’(박평식), ‘빈곤한 상상력’(임범), ‘믿기 힘든 환상’(남다은) 등의 단어로 일갈된다. 한마디로 ‘상업적 목적하에 빈곤한 상상력을 발휘하여 비현실적인 환상을 펼친다’는 것이다. 상업적 목적이야 모든 상업영화의 숙명이므로 논외로 하고, 두개의 충돌되는 비판을 숙고해보자. 나의 의견은 첫째, 영화의 상상의 지평이 현실의 상징질서를 뛰어넘어 있기에 결코 상상력이 빈곤하지 않으며 둘째, 문제의 ‘비현실성’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현실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받아들일 수 없는) 이야기이기 때문인데, 이는 사실이 아니라 당위의 차원이므로 정치적 논의를 요한다는 것이다.

‘다른 가능성’이 판타지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

영화가 던지는 화두는 분명하다. 청소년의 성이나 혼전 순결에 관한 논의도 아니고, 성교육/피임교육의 부재 역시 부차적인 이슈이다. 영화는 제니가 임신한 상태에서 출발한다. 어찌됐든 중학생들끼리 성교하여 임신이 되었으며, 논의의 출발은 여기서부터이다. 선택은 두 갈래이다. 낙태냐 출산이냐.

대다수가 예상하는 매우 ‘현실적인’ 상상의 지평은 이런 것이다.

임신->남자에게 알림->남자는 도피->괴로워하다가 혼자 낙태를 결심하거나, 어른들에 이끌려 낙태를 함 or 너무 늦어서 낙태를 못하고 미혼모가 됨->그 과정에 학교에 알려져 매장됨->정신적으로 상처받고 가족들로부터 외면당함. 출산한 경우 키우지 못하거나 멸시와 궁핍으로 피폐해짐.

위 경로에서 사실 그녀가 선택할 것은 별로 없다. 무엇을 선택하든 불행해질 일만 남았으며, 그나마 불행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하루빨리 몰래 낙태하고, 그 사실을 빨리 잊어버리고, 앞으로는 학업에 정진하라는 것쯤을 조언하고 싶어진다. 그런데 영화는 위의 경로를 취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 수순을 단계마다 위반한다. 남자는 도피하지 않으며, 그녀는 몰래 임신을 유지하고, 친구들은 그들을 지지하고, 가족은 출산된 아이를 윤택하게 키운다. 어찌된 일인가? 예외가 없을 것 같던 위 경로는 이미 당위가 작동된, 그럴 수밖에 없다고 믿고 싶은, 그들이 아닌 바로 ‘우리’가 선택한 상황일 뿐이다.

공식적으로 낙태를 옹호치 않지만, 암묵적으로 낙태가 상식적인 판단이라고 믿는 관객에게 영화는 소크라테스의 대화술로 묻는다. 당신은 내심 낙태를 전제하고 있다. 그 ‘도덕’의 이유를 대보라. “남자는 책임지지 않을 것이오.” 왜? “남자들은 이기적이고 무책임하다(고 ‘순결교육’ 시간과 매스컴에서 배웠소).” 그것은 사실의 문제인가, 당위의 문제인가? 혹시 남성 책임면제의 알리바이는 아닌가? “미혼모에 대한 냉대를 어쩔 것이오?” 그럼 (영화 속 친구들처럼) 냉대하지 않는다면 괜찮겠는가? 이는 문화의 문제이므로 실천적으로 변화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보다 무슨 돈으로 키운단 말이오?” 그럼 돈 나오는 데가 있다면 되겠느냐? “그건 그들이 부자이기 때문이잖소?” 왜 꼭 아이의 양육을 가족이 담당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이렇게 집요하게 파들어가 결국 ‘우리’가 낙태를 묵시적으로 동의하고 있으며, 그 이유로 짐짓 미혼모와 사생아를 걱정하는 듯하지만, 그들을 냉대하는 가부장제(이데올로기)와, 자식을 온전히 부모의 경제력에 의존케 하는 사적소유(구조)가 그들을 비존재로 만드는 ‘장애’ 의 문턱이었으며, 그 장애의 턱에 우리의 ‘신념’이 일조하고 있음을 실토케 한다.

문제는 신체의 자기결정권과 사회적 양육

낙태권을 둘러싼 논의는 서구의 오랜 성정치학적 쟁점일 뿐더러, (부시 정권의) 현실 정치적 문제이다. 흔히 여성의 낙태권을 태아의 생명권과 대립되는 ‘윤리적’ 문제로 인식한다. 그러나 여성과 권리를 다투는 주체는 태아가 아니다. 태아라는 탈젠더화된, 순수보편자가 법적 주체도 아니거니와, 의지의 주체도 아니다. (대체 법이 ‘인간’이라는 지위조차 불분명한 ‘생명’의 권익을 대변한 적이 있었던가?) 여성이 낙태권을 갖고자 벌인 투쟁은 태아와 싸워 이겨 맘대로 살육할 권리를 얻고자 함이 아니라, ‘여성의 몸’이라는 식민지의 지배권을 두고 벌이는 ‘남성-제국’ 대 ‘여성-식민’의 제국주의-민족해방 전쟁이며, 태아의 생명권이라는 순수한 대의명분은 ‘남성-제국’에 의해 동원된 보편성의 외피이다. 낙태권의 본질은 자궁이라는 재생산 수단을 누가 소유/관리 할 것인가를 묻는 정치적인 문제이며, 태아의 생명권을 논하는 고상한 도덕은 일종의 맥거핀이다.

재생산의 결정권을 둘러싼 이 논의는 우리나라로 오면 법과 현실 사이에서 전혀 다른 층위로 존재한다. 성문법은 고상한 이념을 대변하여 극단적인 상황에서만 낙태를 허용한다. 그러나 실제로 무제한의 낙태가 허용된다. 이는 낙태권을 둘러싼 투쟁의 결과가 아니다. 법적 금지의 물밑에서 몇개의 전제들이 담합하여 낙태라는 ‘이면 합의서’를 도출한 것이다. 그 전제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가부장제의 근간을 유지하기 위해 여성의 성행위를 통제하는 순결이데올로기를 온존시키며, 자유로운 성행위를 전제로 한 성교육/피임교육을 하지 않는다.

둘째, 공고한 가족주의를 유지키 위해 혼외 출산을 금한다. 셋째, 자녀 양육의 책임은 전적으로 부모에게 있고, 노동시장에서의 적은 기회로 미혼모의 자녀 양육은 어려우며, 그들을 지원할 복지예산도 없다. 이러한 조건들이 낙태를 선택하게끔 강제하며, 낙태를 줄이기 위한 장치로는 ‘공포와 죄의식 강화’밖에 없다. 이는 순전히 여성들의 몫이다.

법적으로는 낙태권이 없고, 실질적으로는 낙태를 강요받는 상황에서 무엇을 주장하고 요구할 것인가? 낙태권을 주장하는 것이 진보이고 페미니즘일 것 같지만, 이는 거짓 이슈에 농락당하는 꼴이다. 사태의 본질은 낙태가 아니라 ‘재생산의 자기결정권’이다. 낙태권의 기본전제는 그녀가 출산을 원치 않았을 때이며, 반대로 출산을 원한다면 출산권을 주장해야 한다. 낙태냐 출산이냐가 아니라, 그녀가 자신의 신체를 결정하는가 아니면 타자(부모/주인/남자)의 결정에 포박되어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화녀>는 주인에 의해 낙태당하고, <효자동 이발사>의 그녀는 남자-법(?)에 의해 출산당하지만, 제니는 (부모/남자/학교/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출산을 선택하고, 상황을 주도하여 관철시킨다. 더욱이 <네온 속으로 노을지다> <마들렌> <싱글즈> <파송송 계란탁>에서처럼 남자를 배제하지 않고 책임당사자의 한축으로 끌어들이며, <돈텔파파>에서와는 달리 함께 키우고자 한다. 이 영화는 그녀가 출산을 하기 때문에 윤리적으로 올바른 것이 아니라, 그녀가 재생산의 자기 결정권을 쥐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올바르다.

도덕적 결단으로서의 출산은 모든 고통을 산모가 감수토록 하지만, 정치적 선택으로서의 출산은 다른 많은 전제들을 함께 요구토록 한다. 미혼모와 사생아에 대한 사회적 냉대는 가부장제에 기인한 것으로, 혼전 성관계를 공공연히 논의하고 호주제 철폐 등으로 혼외 출산을 인정케 하면 차차 변화시킬 수 있다. 경제문제에 있어서 자녀 양육의 책임이 사회로 확대되어야 하며, 부모-자식 관계의 다층위적 변화를 모색하고, 입양과 수양부모제도도 확대해야 한다. <아이 엠 샘>의 교훈이 무능한 친부냐 유능한 양부모냐의 양자택일 문제가 아니라, 그들 모두의 지원 속에서 아이는 더 잘 자랄 수 있다는 것이었음을 상기하자.

영화는 판타지를 통하여 우리가 상상치 못했거나 용인할 수 없었던 대안적 가능성을 제시한다. ‘비현실적’이라는 비판은 판타지의 실재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소산이자, 현실을 정태적으로 파악함으로써 (현실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는 실천적 담론의 기회를 파묻어버린다. 옥동자는 나왔다. 자, 여기서부터 입을 열어라.

일러스트레이션 김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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